삶과 교육

늘 깨어있어야 선생이다

리틀윙 2018. 1. 26. 13:57

연이틀 새벽에 잠을 깬다. 오늘은 어제 못 잤던 잠을 초저녁부터 잤기 때문에 이 이른 기상이 예견된 것이지만 어제는 어떤 특별한 일로 잠이 깼다.

 

성격이 너무 예민한 나는 이런 일이 있으면 새벽에 잠을 설친다. 한 이틀 간 어떤 문제가 내 의식을 사로잡다가 '결정적 시기에 이르러 내 무의식 속 어떤 의무감의 발로에서 저절로 잠이 깬다. 흡사, “, 너 정신 차려!” 하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한 달에 한 번씩 매월 첫째 월요일 오후 직원협의회를 갖는다. 어제는 화요일이지만 연휴 끝의 첫 날이기 때문에 회의 열 공산이 컸다. 그 일정을 앞둔 시점에서 내 무의식이 내게 명령하는 것은, “너 오늘 회의 때 일어서서 한 마디 하라는 것이었다.

 

학교에 출근하여 교실 컴퓨터를 켜고 나서 내부 전산망(NEIS) 속의 공문함에서 교장실 가구와 관련한 내부문서를 열람했다. 예상대로 상당 금액이 지출되었다. 무려 516만원이다. 며칠 전 이 문제를 그저 페이스북 상에 긁적이고 말았지만, 우리 학교 교직원 집단 내에서 문제의식의 공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강박관념은 연휴 내내 지속되다가 마침내 어제 출근을 앞두고 터진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또 훌륭한 인품에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관리자이시기 때문에 내가 선뜻 행동에 옮기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516만원은 너무 했다. 사적인 입장을 떠나 공적으로 이건 누군가가 문제제기를 해야만 했다. 지나간 일이기에 문제를 바로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이 시점에서 이 문제를 짚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 내 각별한 오지랖의 핵심도 이것이다.

 

학교라는 곳의 일상이 이런 모습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후배 선생님들에게 전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짰다. 키워드 중심으로 메모를 했다.

 

학교에서 회의는 보통 업무담당자들이 당면한 학사 또는 행정 현안을 돌아가면서 전달한 뒤에 교무부장과 교감의 발언에 이어 마지막은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 흐름도에서 내가 뛰어들 적절한 지점을 나는 안다. 교사들끼리의 업무 전달과 의견 공유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교무부장이 발언하기 전에 일어섰다.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의 발언은 업무 전달이 아닙니다. 학교운영과 관련한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성찰해 봤으면 하는 뜻에서 드립니다. 여러 선생님들을 불편하게 만들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반드시 거론이 되어야 합니다. 직원협의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이 회의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장실 소파에 관한 문제입니다. NEIS 문서함에서 교장실 가구로 검색하니 516만원이라는 금액이 집행되었습니다. (2초간 호흡)

제가 볼 때는 멀쩡한 가구를 한두 푼도 아니고 이렇게 거금을 들여 예산집행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호흡)

학교장이 바뀐 다음 학생교육과 무관한 곳에(강조)” 이렇듯 큰 규모의 예산을 지출하는 것은 학교사회의 오랜 관행입니다. (호흡)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적폐입니다!

비효율적인 예산집행도 문제지만, 의사결정의 과정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큰 규모의 예산집행을 부장회의 등의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고 학교장이 독단으로 결정되는 것은 정말 아니 될 일입니다.

(호흡 또 호흡)

저도 일어서서 이런 말씀 드리기가 참 불편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말을 해야 하는데 제가 볼 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연령 구조상 대부분 젊은 선생님들이신데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일어섰습니다.

제 옆반 *** 선생님은 올 3월에 첫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학교라는 곳이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실 뒤에서 이렇게 비합리적인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 교실 속에서 수업만 열심히 하는 것은 교사의 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

중간에, “교장선생님의 해명을 듣고 싶다는 말도 했는데 어느 지점에서 했는지 기억 안 난다. 내 발언이 끝나고 교장선생님께서 바로 해명하시겠다며 말문을 여셨다. 나의 도발에 교장선생님께서는 덤덤한 어조로 말씀을 하셨다. 내용을 요약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말씀 뒤에 내가 교장선생님의 성의 있는 답변에 고마운 한편 죄송하다고 화답했다.

 

이윽고 교무부장의 발언과 교감-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회의는 끝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사람이 사람을 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만약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더 큰 후회를 두고 두고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회의 마치고 퇴근시간이 다가왔지만 평소 학교 이야기를 믿고 나누는 옆 반 후배 선생님에게 건너가 나의 무거운 마음을 약간이라도 털어내고 싶었다.

 

- 제가 너무 나갔죠?

- 아녜요 선생님. 너무 좋았어요. 저는 선생님 말씀 도중에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입장이 죄송스럽기만 했어요.

 

잠시 후 다른 몇몇 선생님들도 건너 오셔서 소회를 나누셨다. 우리 학교는 대부분 젊은 선생님들이어서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소심한 마음에, 후배 선생님들께 나의 발언이 너무 불편하게 다가가지 않길 바란다고 했더니, 선생님들께선 아니라고 그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하신다. 모두가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하는 것이 불편했는데 내가 대신 말을 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하신다.

 

후배 선생님들께 공치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욕을 안 먹으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니, 욕을 먹더라도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교사가 돼서, 일상 속의 불의에 눈을 감으면서 아이들 앞에서 정의를 논할 수는 없다.

용기가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좋다. 마음속에 분노는 품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뒤에서 욕이라도 해야 한다.

 

나의 조야한 무용담을 자랑질 하기 위해 새벽에 이런 글 쓰는 게 아니다. 외람되지만, 우리 학교의 후배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페친이신 선생님들께도 이 사태와 나의 메시지를 나누고 싶었다. 있었던 일에 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상히 적는 이유는 나의 정서와 문제의식 그리고 실천의 이모저모가 선생님들께 유용하게 전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제 몇몇 후배 선생님들은 많이 배웠다고,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는 걸 깨달으셨다고 한다.

 

이게 비고츠키가 말하는 매개(mediation).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공유될 수 있는 게 인간 삶이다. 교단에 첫발을 내딛은 젊은 교사가 언어도단의 부조리를 직면했을 때 선배들이 모두 입을 다물면 그 분은 침묵을 학습하게 된다.

 

알다시피 이런 일은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봄이 왔지만 학교는 아직도 겨울이다. 물론, 일반 회사는 더 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회보다 교직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교사인 사람은 자기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부조리와 사회적 모순에 예민해야 한다.

 

늘 깨어있어야 선생이다.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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