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새해 복 많이...

리틀윙 2017. 2. 27. 12:07

 

정유년 새해 셋째 날을 맞이한다.

 

연초이고 해서 문자나 전화 통화 끝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을 습관처럼 주고받는다.

새삼 '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이란 말은 그 자체로 개인주의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시장경제사회에서 복 많이 받기는 물화(物化)된 욕망이 투사된 소외의(alienated) 수사법일 뿐이다. 만인이 만인에게 야수가 되어 살아가는 이 잔인한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나의 복()’남의 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수능시험 앞두고 팔공산 갓바위 같은 데서 부처님상 앞에 복채 놓고 비나이다!’를 주문하는 사람들 볼 때 그런 생각 든다. 복이 복채(福債)의 등가물인가? 자판기에서 동전 넣고 커피 뽑아 먹듯이 복을 그렇게 받을 수있는 것일까?

 

새해에 나의 사업이 흥하려면 남의 사업이 망해야 하고, 우리 애가 좋은 대학 들어가려면 남의 애가 떨어져야 하는 제로섬게임의 굴레 속에서 복 많이 받으라가 덕담일 수 없다. 구조적으로 모두가 복 많이 받을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인사말은 최순실이와 이재용처럼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담합의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대신, “(우리가) 새해 복 많이 짓자하면 좋을 것 같다.

 

복은 개인적 친화관계에 있는 너와 나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속성이다. 따라서, 복은 ~로부터(from) 받을 것이 아니라 ~와 함께(with) 경작해 갈 일이다. 광화문 광장의 정서로 말하자면, 복은 선량한 이웃들이 연대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그럼 결국 이 또한 누구로부터 복을 뺏어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부의 본질은 도둑질이다. 프루동의 이 말이 과도한 명제가 아닌 것은 다름 아닌 현금의 한국사회가 잘 보여준다. 한줌밖에 안 되는 악덕재벌과 정치 협잡꾼들이 갈취해 간 부를 근로민중이 되찾는 것은 정의의 실현일 뿐 뺏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의의 실현을 통해 그 착취자들 또한 진정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점이다. 프레이리의 말을 빌리면, 억압자와 피억압자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대의는 오직 피억압 민중의 몫이다. 지금 최순실과 정유라 그리고 박근혜의 자화상을 보라. 지금은 물론 예전에도 이들이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사치라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품는 인간해방의 숭고한 뜻 속엔 저 사람들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들도 좋은 세상에 태어났다면 저렇듯 소외된삶을 살진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못 가져서 소외되고, 부자들은 너무 많이 가져서 소외된 삶을 사는 이 정신분열의 사회가 변혁되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복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새해에도 우리의 복은 보다 많은 이웃이 참여하는 광장에서 함께 경작해가야 한다.

 

악덕 재벌들과 정치모리배들이 사바사바 다 해먹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받을 복은 없다. 복은 쟁취하고 지어가는 것이다.

 

새해에도 복 많이 지읍시다!

민주시민이 연대하여 이 나라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합시다.

 

2017.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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