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초 이야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리틀윙 2017. 2. 26. 23:09

결국 달달한동아리 부서들이 채택되었다 - 인형부, 만들기부, 블록부.

처음에 교사들이 제안한 부서 가운데 독서생태가 빠진 것이 유감이지만, ‘연극미술(팝 아트)’은 지켜낸 것에 위로 삼는다.

 

 

 

며칠 전 교사들끼리 이 부서들을 최종적으로 결정짓기 위해 퇴근 시간 넘기면서까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제안한 부서들을 채택하는 것은 물론 원하는 아이들을 다 받아 주기 위해 블록부는 두 부서로 편성하자고 했지만 내가 극렬히 반대하여 정족수 외의 인원은 교사들이 제안한 부서로 가게 했다. 새로 오신 선생님들은 내가 왜 그렇게 흥분하면서까지 이러는지 잘 모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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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중심에 학생(아동)이 있어야 하고,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자의 흥미라는 존 듀이 식의 진보주의 교육관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교육의 중심에 아동을 던져 놓고 교사는 그 언저리에서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는 식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자유주의가 아닌 방임주의이고 진보가 아닌 무책임 그 자체다. 그간 이 학교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이 이 지독한 보수지역에서 어렵사리 만들어진 자생적 혁신학교의 에토스를 적잖이 훼손시켜 놓았다.

 

진보를 빙자한 무책임한 방임주의자들이 혁신학교를 망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런 분들이 주장하는 학생중심주의가 뭐가 문제인지는 경제학에서 그래샴의 법칙으로 일컫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명제로 설명이 된다.

그래샴이 살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화폐를 금과 은으로 만들어 썼다. 100달러짜리 금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100달러어치의 금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그런데 일부 군주들이 이 주화에 불순물을 섞어 화폐가치가 액면가에 못 미치는 불량 금화를 만들어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그 뒤 불량 화폐가 대세가 되어 사람들은 순금으로 만든 양화는 집에 숨겨 놓고 악화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래샴은 나쁜 돈이 착한 돈을 몰아낸다는 의미로 “Bad money drives out good.”이라 일컬었는데, 1이면 해석할 수 있는 이 쉬운 문장을 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어려운 말로 옮겼는지 유감이다(악문이 선문을 구축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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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가졌던 한해 교육살이 반성회에서 나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잘 읽지 않는 이 학교의 학생문화를 거론하면서 도서관의 찜질방화라는 말로 심각한 문제의식을 피력하였다. 이 학교에서 아이들은 도서관을 일종의 해방구 내지 휴식처로 활용한다. 어떤 녀석은 도서관 책진열장을 은폐물 삼아 구석에 처박혀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가 하면 보통은 도서관 바닥에 열선 처리된 바닥에 드러누워 잡담을 나누곤 한다. 나는 경악한다. 이게 찜질방이지 도서관인가?”

그랬더니 지금은 떠나고 없는 어떤 분이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꼭 책만 보라는 법있냐?”는 말로 응수해 온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항상 구체적으로접근할 일이다. 일견 그럴듯한 이 말의 허구성은 현실 속에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따져봄으로써 밝혀진다. 아이들에게 찜질방 자세(=악화)와 책 읽는 자세(=양화) 둘 다를 허용할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규모 학교 치고 이처럼 잘 갖춰진 도서관은 잘 못 봤고, 반대로 이 학교 애들처럼 도서관에서 책 안 읽는 경우도 나는 못 봤다.

 

물론 강력한 통제력을 발동하여 악화는 금기시하고 양화를 강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설령 교육적 의의가 적고 달달하기만한것이라도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쉬운 것은, 교육적 입장에서 교사가 제안한 어떤 활동에 대해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에 대한 가치 인식과 흥미를 갖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 점이다. (변명 같지만 3월이어서 그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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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 씁쓸한 진리는 교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학교와 달리 교사가 관리자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거꾸로 관리자가 교사와 학부모의 눈치를 보는 이 학교에서 교사들은 자칫 자유방임의 달달한 일상에 안주하기 쉽다. 그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사의 자율성이 최대한 존중되는 이런 학교에서 교육실천에 임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한 자기규율의 의지. 그리고 선량한 의지와 나쁜 의지가 경합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가능성이 많다.

 

교육의 본질은 사랑이라 하지만, 사랑은 맹목이 아닌 분별인 까닭에...... 선량한 의지가 나쁜 의지에 구축당하지 않기 위해서 전자는 무장된 사랑 armed love’을 지녀야 한다.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당파적(partial)이다. 중립적인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인류 최고의 성인이신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진 않았다.

내가 달달한 동아리 부서에 남다른 반감을 품는 것도 작년의 안 좋은 경험 때문이다. 무책임한 자유방임주의자는 달달한 부서 지도교사를 맡아 아이들이 달달한 활동에 몰입할 때 자신은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양화가 악화로부터 구축되지 않고 역으로 그것을 구축하기 위해선 투쟁이 불가피하다.

 

2016.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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