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예술이 어떤 사회적 메카니즘에 의해 존재하는가?

리틀윙 2017. 2. 20. 20:33

# 예술이 어떤 사회적 메카니즘에 의해 존재하는가?

 

예술과 사회구조와의 관계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테제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와의 관계와 일맥상통합니다. 상부구조로서의 예술은 하부구조(경제구조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는...... 너무도 진부한 명제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기도 하죠.

상부-하부구조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liveas1/6498579

 

인류 정신사에서 마르크스주의만큼 장수해온 사상체계는 없습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멸망해도 마르크스주의는 살아남았습니다. 낡은 사회주의 블록이 망하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건강한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저는 봅니다. 달리 말하면, 기존에 마르크스주의를 병들게 만든 것이 소비에트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였던 거죠.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것을 공격한 사람들의 타겟은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한 어떤 예언적 속성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입장이 칼 포퍼가 쓴 [열린 사회의 적들]인데... 마르크스주의가 품고 있는 결정론(determinism) 혹은 목적론적(teleological) 관점에 대한 비판입니다. 실로 이런 비판에 마르크스주의가 취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를테면, 구체적으로 자본주의가 언제 망한다는 예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꼴통 추종자들인 소비에트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자들은 20세기가 가기 전에 망한다고 호언장담했던 거죠. 그런데 망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들(소비에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꼴통 우파들이 , 마르크스주의는 거짓임에 판명났다.”고 떠든 거죠. 이 악의적인 논평이 설득력을 상실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결정론적 속성은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히 지독한 반공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그 강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약점만 물고 늘어집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복잡한 인간사회를 이렇듯 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인 거죠. 실로 이 하나의 정식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됩니다. 제 블로그에서 <존재와 의식>이란 폴더의 글들이 전부 이런 맥락에서 쓴 겁니다.

 

존재양식의 변화가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좋은 예로 양담배외제자동차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명제에서 말하는 존재양식이란 물질적 부분 혹은 경제 조건을 말하는데, 지배계급(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말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외제차 모는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십 수년 전에는 양담배 피는 사람을 매국노 취급했죠.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양담배는 말할 것도 없고 길거리에 늘려 있는 게 외제차입니다. FTA라는 경제구조(존재양식=하부구조)의 변화가 국민의식(의식=상부구조)을 바꿔 놓은 겁니다. 생산력이 낮아서 자국의 자본(한국 재벌)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들은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국산품 애용을 미덕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국내 재벌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가질 만큼 성장하자, 양담배 수입을 허용하더니 FTA 거래를 트면서는 외제차에 대한 관세장벽을 허물면서 너도나도 외제차를 모는 게 유행이 됐습니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 예술이 어떤 사회적 메카니즘에 의해 존재하는가?

 

# 자본주의사회 이전부터 예술은 존재했는데 왜 유독 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예술이 일탈의 길을 걷고 있는가 

 

위의 두 물음은 사실상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오직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만이 설명이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가 인간역사의 패러다임 변천을 설명하는 이른바 사회구성체론에서 자본주의사회는 그 이전의 패러다임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수성을 갖는다고 말한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원시공산사회 이후 시작되는 계급사회에서 고대노예사회나 중세봉건사회와 확연히 다른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입니다. 자본주의사회가 그 이전 사회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보다 생산력의 폭발적 증가에 기인합니다.

 

예술의 예를 들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음악분야에서는 축음기나 라디오/TV의 발달로 미천한 계급에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각예술(미술) 분야에서는 원본의 무한복제가 이루어지며 박물관 관람이 대중화되는가 하면, 결정적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예술작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봉건사회에서 소수의 특권층(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에 대중화의 길이 열린 겁니다. 예술 자본가의 입장에서 이것은 환영할 일이죠. 예술상품을 소수의 귀족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하는 것보다 절대다수의 대중들에 싸게 파는 것이 훨씬 돈이 되니까요. 그런데 천한 것들에게 예술을 팔기 위해선 하향평준화가 요구되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바흐와 모차르트도 자신의 예술 창작물을 구매하거나 혹은 스폰스 업주인 귀족 음악애호가의 취향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취향은 문자 그대로 클래시컬한수준이었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자기 수준에서 이해 못할 정도의 어려운 음악을 작곡해줘도 , 정말 좋다.”는 감탄과 찬사로 화답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식한 졸부라는 평을 들어야 하니깐요. 이건 오늘날 재즈 매니아를 자임하는 이들의 허영심과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어쨌든 자본주의 이전의 예술은 이런 식으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도 하부구조(=귀족 기반의 경제구조)가 상부구조(=귀족의 예술적 취향)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사회, 특히 현대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예술은 문화상품으로 둔갑하면서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천박한 감각에 호소하는 쓰레기로 전락하였습니다. 상혼에 찌든 문화상품은 아도르노가 말한 동일성의 원리를 특징을 합니다. 이에 대해 제가 다른 글에서 쓴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각박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가급적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노브레인이 되는 것이 생존 전략상으로도 유리하다. 남들과 다른 생각, 개인의 주체성을 접어두고 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정착된 어떤 통일적인 원리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는 대중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지배계급이 결정해준다. 이것이 아도르노 철학의 핵심개념인 동일성의 원리이다.

 

동일성(Identitἄt, identity)이란? 영어와 독일어 공히 아이덴티티란 단어는 동일함정체성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일성이란 난해한 개념은 이 두 의미를 조합해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쉽게 이해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별 대중의 정체성들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유포된 어떤 공통의 원리에 따라 동일하게형성된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산업이 이러한 포섭 기제의 첨병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인들이 고상한 정서의 발로라고 착각하는 애정행각도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눈 오는 날에는 연인과 데이트를 즐겨야 한다거나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주고받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동일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눈 내리는 날은 곧 데이트라는 조건반사적인 정서기제는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자본이 매스미디어를 시켜 우리에게 각인시켜 준 자본주의적 산물인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성애(sexual love, 보통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그것)에 미치면 미칠수록 바람직하다. 하다못해 초콜릿이 더 많이 팔릴 것을 비롯해 문화산업을 포함한 모든 소비산업이 흥행할 것이며, 무엇보다......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말살시킬 수 있는 점에서 동일성은 자본주의사회가 존속 유지되는 중요한 원리인 것이다.

 

눈 내리는 날에 연인과 극장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따른 것일까요? 우리가 선호하는 어떤 정신은 얼핏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본(=시대의 존재양식)이 우리의 정서(=개인의 의식)를 지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지배계급의 사고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결정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속류 유물론자들이 오해하듯 물질적 부분만 강조하고 정신적 부분을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상부구조에서 교육의 역할을 중요시 여긴 것입니다. , 특정 시대의 교육이 하부구조(=지배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꾸로 그 부조리를 혁파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은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이란 개념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예술의 중요성도 바로 이 상대적 자율성에 있습니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하지 않고 반헤게모니(저항헤게모니 counter-hegemony)의 속성을 품는 것이 예술의 본질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선생님께서 통찰하신 재즈와 클래식 음악이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봅니다. 재즈와 달리 클래식 음악은 현실세계의 모순에 고뇌하고 저항하는 의지를 엿보기 힘듭니다. 제가 일전에 민선생님 카페에도 글 남겼듯이, 위대한 재즈 뮤지션들이 하나같이 약에 찌든 삶을 살았던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병리적 사회시스템의 예술가들에겐 필연적인 운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상에 유배된 천사 빈센트가 그러했듯 말이죠. 푸코의 개념을 빌리면, 자본주의사회의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광인이 돼야 하는 겁니다.

 

이상으로, 마르크스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물음에 답해 봤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를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유력한 지적 체계가 마르크스주의라고 저는 보고 어설픈 제 식견을 나열해 봤습니다.

 

제 서재에 있는 책들 가운데 두 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1) 세계의 문화와 조직, Geert Hofstede 지음, 학지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9703312

 

2) 예술철학의 초대, 강대석 지음, 동녘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53399&barcode=9788972973225

 

다행히 두 책 모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네요.

 

1)은 비교문화(comparative culture)라는 접근틀로 국가간에 그리고 지역별/계층별/성별에 따른 문화의식 수준을 비교하고 그 인과관계를 규명하는데, ‘문화라는 말을 예술로 바꾸면 민선생님이 오늘 제게 전화로 물으신 그 주제와 유사합니다.

 

2) 국내에서 대학교수로는 드물게 마르크스주의에 정통한 지식인의 책입니다. 문체나 색깔이 80년대 운동권을 연상케 하지만 굉장히 논리적이고 학문적 깊이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예술철학(미학)에 대한 입문서로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아쉽게도, 국내는 물론 외국 학자들 가운데도 미학자들은 죄다 문학이나 미술 분야에 국한할 뿐, 음악미학자를 보기 힘듭니다. 아도르노가 유일하다시피 한데, 이 분은 클래식에 심하게 편향되어 팝음악은 물론 재즈의 경우도 심지어 찰리 파커와 같은 Bebop 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감이죠.

 

이상, 두서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는데,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반론 혹은 질문이 있으면 주시기 바랍니다. 

 

2015.5.6

'이성과 감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0) 2018.01.26
대구 명덕네거리 근처  (0) 2018.01.26
록음악의 아이콘, 지미 헨드릭스  (0) 2017.02.19
에로스와 로고스  (0) 2017.02.19
재즈의 탄생  (0) 201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