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없다

리틀윙 2016. 10. 11. 09:32

총장님 한 바꾸 더 돌까요?

 

청년시절 격동의 80년대를 보낸 386세대들은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무소불위의 파소정권이 사회를 지배하는 곳에는 교육영역이든 어디든 절대권력자가 지도자로 군림한다. 대학의 총장도 그러했다.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인 1986년 조선대 총장 박철웅은 아침마다 교직원 조회를 열어 일장훈시를 한 뒤에 교수들과 함께 학교운동장을 돌았다고 한다. 젊은 교수든 나이든 교수든 남자든 여자든 교수직을 지키고 있으려면 총장과 함께 구보를 해야 했다. 88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을 맞아 당시 조선대 운동장은 국제올림픽 규격에 맞춰 새로 지었다고 하니 운동장 한 바퀴는 무려 400미터다. 연로한 여교수가 그 운동장을 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 교수진 가운데 어느 간신배가 총장에게 과잉충성의 뜻으로 총장님, 한 바꾸 더 돌까요?”라고 했다는 말이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대학사회의 이야기이다. 새누리당 정치모리배들의 모습이 아니라 상아탑의 이 나라 최고 식자층의 풍경이다. 당시 대학교수에게 제일 중요한 임무는 학생 동태를 파악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교수라는 자가 학문을 연구해서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과 형사처럼 학생운동을 감시하고 그 주동자를 고발하여, 자기 제자인 학생이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에 끌려가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당하게 내모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매한 인격과 지성의 소유자들도 언어도단의 사회체제 속에서는 한 마리의 버러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내가 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대학사회가 그러하니 초중등 교직사회도 암울하긴 마찬가지였다. 대학교에서 총장이 그러하듯, 학교에선 교장이 왕이었다. 인근 학교에서 임신한 여교사가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보는 데서 운동장을 돌게 하는 교장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런 언어도단의 시대는 가고 없다. 그런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칠흑 같은 어둠이 어떻게 걷힌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악의 무리들이 개과천선해서 밝은 세상을 오게 한 것일까? 절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 독재자들이 제 발로 감방에 들어가고 부정축재로 모은 더러운 재산을 자진해서 사회에 환원하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강제해 낸 것은 역사 발전의 힘이고,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구르게 한 것은 80년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의로운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지난 번 나의 글 뜨거운 사랑을 나누더라도 시대의 고민, 사회적 모순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자 한다. 나의 이 말에 대해 청춘남녀의 사랑이 사회모순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는 반론을 주신 분들이 몇 분 계셨다. 다시 말하지만,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개인의 삶은 사회의 운명과 함께 한다. 불행한 사회, 뒤틀린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 설령 운이 좋아서 좋은 직장에 호화스러운 집에서 호의호식을 하며 예쁜 아내와 함께 금수저의 삶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프루동의 말대로, 사유재산의 본질은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누리는 과도한 부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이의 희생과 결핍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그 자체가 죄악인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한 것은 이런 뜻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시키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도 암울한 전체주의 문화 속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하철에서 남녀가 자유롭게 뽀뽀 하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서로 좋아 뽀뽀하면 그만이지 사회적 모순 따위에 대해 고민할 의무가 뭐가 있나 할지 모른다. 아니다.

 

첫째, 도의적으로,

방금 말했듯이, 당신이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뽀뽀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당신 앞선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공적 헌신과 희생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실용적으로,

어느 시대에도 공적 헌신은 필요하다.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작은 실천들이 마련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불행해 진다. 흙수저인 여러분들이 금수저에게만 유리하도록 되어 있는 불합리한 사회시스템이 이대로 흘러가도 좋은가? 여러분들이 사회모순을 외면하면 이 부조리는 더욱 심화될 것인데도 말이다.

 

셋째, 인간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른 삶을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인간다운 삶이 뭔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인간다운 사랑을 나누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이라 하겠다. 그게 없이 그저 세상사를 외면한 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보면 그만이라는 식은...... 그런 뜨겁기만 한 사랑은 동물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의 사랑은 발정난 돼지들의 몸부림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공부하는 학생은 등록금 걱정 없이 오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제도개선을 요구해야 하고, 납세자는 가진 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 혜택을 요구하고,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는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는 사회문화를 소망할 일이다. 이 모든 욕구는 필연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요청한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는 가고 없지만, 대학가에서 데모하는 청년들이 실종된 지금 이명박근혜라는 신종 파쇼를 겪으며 이 사회가 다시 혼탁해지고 있다. 젊은 분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니 늙은 분이 데모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오늘 절명하셨다.

 

이 분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 개인의 운명은 사회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다. 개인의 행복도 불행도 모두 사회적인 현상인 것이기에 순수한 개인의 몫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2016.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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