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Both Sides Now : 통합적 시각으로 교육 바라보기

리틀윙 2016. 4. 23. 21:08

들어가는 말: Both Sides Now


무릇 교사는 지적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이다. 나의 지적 여정에서 어느 순간 내가 성큼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 때가 있다. 개인이 지적으로 성장한다 함은 철학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많은 양의 독서를 통해 지식을 축적한들, 양적 팽창이 질적 발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인식론의 성장’을 통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법이다. 내 경우는 지금 논하는 이 인식론의 틀(framework)을 갖게 된 이후 사고의 질적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책 [교사가 교사에게]에선 이 틀을 ‘통합적 시각’이라 일컬었다. 책의 곳곳에서 통합적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갔지만 특히 3부의 글들은 모두 그런 내용들이다. 이 때문에 3부가 어렵게 읽히는 것이지만, 통합적 인식론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흥미 있게 읽어 가리라 본다.



모든 사물은 상호대립적인 두 속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통합적 시각’이란 사물의 대립적인 두 속성을 각기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이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 통합적 인식론을 잘 설명하는 노래가 있다. 이 흥미 있는 노랫말 속에 통합적 시각의 정수가 녹아 있다. 이 노랫말을 음미해봄으로써 통합적 시각을 쉽고 흥미있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노래는 1968년에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라는 싱어송라이터가 만든 [Both Sides Now]이다.







 

사춘기의 문학소녀일 법한 화자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 역동적인 변화의 양상을 나름 심오한 수사로 표현하고 있다. 맑은 날 동화 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던 구름이 기상 변화로 인해 비구름으로 변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름다운 구름과 불편한 구름이 별개의 것이 아닌 한 몸인 점이다. 같은 구름 속에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2절과 3절에서 화자는 각각 사랑과 인생에 대해 노래한다. 청춘남녀가 죽고 사는 사랑이라는 실체야말로 극과 극의 대립적 측면이 동시에 존재함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혹 사랑의 밝고 달콤한 측면만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 씁쓸한 측면이 도래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사랑은 눈 먼 사랑일 가능성이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숱한 승리와 실패, 기쁨과 슬픔, 환호와 한숨, 웃음과 눈물로 점철되지 않던가?




형식논리 뛰어 넘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철스님의 법문으로 유명한 위의 말은 통합적 관점을 운치 있게 담고 있다. 얼핏 보면, 위의 선문답은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은 산이어야지 산이 아닐 수는 없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모순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산은 산이다”와 정반대되는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두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지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이른바 ‘배중율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어디까지나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이래 지금까지 통용되어 오고 있는 이 기계적 논리로는 저 심오한 법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위의 세 명제는 오직 통합적 시각으로 접근할 때만이 그 오묘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참선 이전의 산은 참선 이후의 산과 같지 않다. 그리고 더욱 깊은 참선을 통해 득도 했을 때의 결과는 또 달라지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은 철학에서 실증주의와 맞닿아 있다. 실증주의자들은 사물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판단하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일 수는 없다고 본다. 모리스 콘포스(Maurice Cornforth)라는 철학자는 실증주의의 이러한 인식론을 ‘형이상학적 양자택일(metaphisical either-or-not)’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형식논리학이나 실증주의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사물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법이다. 같은 구름이 어떤 때는 흰구름이었다가 또 다른 때는 비구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존 듀이, 이원론의 배격


“모든 사물은 서로 대립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고 할 때, 이 각각의 측면을 극성(極性)이라 하고 두 극성의 조합을 범주쌍 또는 양극범주쌍(bipolarity)라 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Both Sides (Now)’의 인식론은 이 상호 대립적인 두 극성을 양자택일적 관점이 아닌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을 말한다.
존 듀이는 철학사의 발전과정을 이원론의 극복 과정으로 보았다. 그의 명저 [민주주의와 교육]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접근틀이 통합적 관점이다. 듀이는 ‘통합적 시각’이란 말 대신 ‘이원론의 배격’이란 표현을 자주 쓰고 있는데, 그는 매 챕터마다 당대의 주된 교육 이슈들을 제기함에 있어 그간 양자택일의 문제로 봐 왔던 대립적인 두 속성을 “지금부터는 통합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을 한다. 즉, 그의 결론은 늘 “Both Sides Now!”인 것이다.
이를테면, 듀이는 민주주의 교육의 개념을 논하면서(7장), 서양 교육사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해온 두 사상가인 루소와 플라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듀이가 보기에, 두 사상가는 서로 대립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개인과 사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루소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플라톤의 무게중심은 사회 쪽에 경도해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듀이는 개인성과 사회성의 통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비움과 채움


지금부터는 [교사가 교사에게]에서 다룬 것을 중심으로 몇 가지 중요한 교육 이슈에 대한 통합적 시각의 의의를 논하고자 한다. 그 첫 순서로 글쓴이가 존 듀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통찰한 것으로서 (비움, 채움)이라는 범주쌍으로 제시한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민주주의와 교육] 4장 – 성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Growth – 은 성장의 제일가는 요건에 대한 자문자답으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 듀이는 “성장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미성숙(immaturity)”이라고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하지 않은 채로 있어야 한다는 이 말은 자칫 무의미한 동어반복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존 듀이 특유의 이 허허실실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 교육이 지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존 듀이는 역량을 뜻하는 영단어 ‘capacity’가 그 뜻 외에 ‘용량(容量)’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논하는데, 글쓴이는 여기서 노자의 ‘그릇’ 메타포가 떠올랐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그릇의 쓰임이 채움이 아닌 비움에 있음을 논한다. 그릇이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선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아이의 머릿속에 뭘 채워 넣으려고만 애쓴다. 직관적 사고력과 왕성한 호기심을 키워갈 나이에 한글이니 영어니 하는 지식을 채워 넣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습에 대한 흥미와 지적 호기심을 말살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방학에 해당하는 영단어 ‘vacation’나 프랑스어 ‘바캉스’는 ‘텅 비움’을 뜻하는 라틴어 ‘바카티오 vacatio’에서 유래한다. 일 하는 사람이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일상을 텅 비우고 휴가를 다녀오듯이,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공부를 더 잘 하기 위해 방학 때 머리를 텅 비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 가운데 겨울방학 뒤에 부쩍 성장했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긴긴 방학 동안 집과 학원만을 왔다 갔다 한 아이들에게선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런 징후가 발견되는 아이는 필경 머리를 텅 비우고 긴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뭔가 이색적인 경험을 한 아이일 가능성이 많다.
아메리카인디언들은 급히 말을 달리다가고 가끔씩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혹 자기 영혼이 미처 못 따라올까 걱정하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채우기 위해 우리는 먼저 비워야만 한다. 비움과 채움이라는 두 대립적 속성은 실상은 한 몸이건만 현대인들은 비울 줄은 모르고 채우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아이나 어른 모두 머리와 가슴이 망가져 간다.




흥미와 도야


존 듀이는 교육의 본질을 “흥미에 의한, 흥미를 위한, 흥미의 교육”으로 보았다. 교육에서 흥미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교육] 10장에서 ‘흥미와 도야’라는 제목으로 다루는가 하면, 별도의 저서로 [흥미와 노력]을 발간하기도 했다.
어원적으로 흥미(interest)란 말은 ‘inter-esse’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이란 의미이다. 듀이는 학생의 현재 학습역량, 교육학 용어로 ‘출발점 행동수준’과 학습의 결과로 의도하는 목적(end, 끝 지점) 사이에 있어야 할 무엇이 ‘흥미’라는 명쾌한 논리를 펼친다. 출발점에서 끝 지점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학습자의 흥미는 필수적이며, 거꾸로 흥미가 바탕 되지 않으면 진정한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흥미와 공부(도야, discipline)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우리는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공부는 괴롭고 힘든 과업으로 치부하고선 거기에 대한 보상책으로 공부와는 무관한 흥미를 즐기는 시간을 허용하는 발상으로서, 이를테면 “숙제 다 했으니 컴퓨터 게임 해도 좋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값싼 유인책으로서의 유희는 존 듀이가 말하는 흥미와 아무 관계도 없다. 듀이에 따르면, 공부는 흥미 그 자체여야 한다. 공자도 말했듯이, 배우고(學) 익히는(習) 것은 즐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흥미, 도야)의 범주쌍을 이루는 두 대립물의 조화는 결코 이상주의자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의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이 같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미술-음악-체육의 예체능 교과 시간은 물론 과학이나 실과(가정) 실험 실습 시간에도 아이들이 진지한 눈빛으로 흥미 있게 학습활동에 참여한다.
흥미와 배움이 나란히 함께 가는 이런 흐뭇한 광경의 전형은 평생교육 차원에서 노인이나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아카데미 교실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지적 활동에 호기심과 흥미를 품는 존재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습 의욕을 상실해 가는 것은 배움의 속성이 본래 그러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반교육적인 시스템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삶과 교육


배움은 본디 즐거운 것임에도 왜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것일까? 존 듀이는 그 이유를 삶과 교육이 유리된 탓으로 보았다. 앞글에서 학생들은 예체능 교과나 실험실습 위주의 공부에 흥미를 갖고 참여한다고 했다. 이런 교과 공부의 공통점은 몸으로 배우는 공부라는 것이다. 반면, 머리를 쓰는 공부에서 학생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학습의욕을 상실해 간다.
머리 쓰는 공부와 몸 쓰는 공부의 관계에 대해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의 20장에서 ‘Intellectual And Practical Studies’라는 범주쌍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한글판 역자 이홍우 선생께선 이 장의 제목을 ‘이론적 교과와 실제적 교과’로 옮기고 있는데, 나라면 ‘머리 쓰기 공부와 몸 쓰기 공부’로 옮길 것이다.
듀이가 설명하듯,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몸 쓰기를 통해 얻은 지식을 하찮은 것으로 본 반면, 머리 쓰기를 통해 얻은 관조적 지식을 최고의 것으로 쳤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인간을 금-은-동의 세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머리 쓰는 철학자들에게 최고 등급을 부여하고 이들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지식에 대해 이처럼 편향된 지식관은 동양의 유교사상에서는 더욱 심각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 결과, 공부는 힘들고 지겹기만 한 무엇이 되고 말았다.
흥미와 공부가 함께 가기 위해선, 몸 쓰기와 머리 쓰기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자면, 교육이 삶 속에 있어야 하니, 존 듀이는 이를 ‘삶 중심 교육과정 life-centered curriculum’이라 일컬었다(이 말을 ‘생활중심교육과정’으로 옮기는 것은 거의 오역에 가깝다). 교육이 삶 속에 들어가고 삶으로부터 교육과정을 추출해 내자면, 뒤에서 다룰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1Km라는 개념에 대해 그저 ‘1Km = 1,000m’라는 식으로 외울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1Km를 걸어가 봄으로써 익히는 것이다.
머리 쓰기 교과(주지교과) 가운데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어렵고 지겨운 것이 ‘사회’다. 나 역시도 초중고 시절 공부에서 제일 힘겨웠던 과목이 사회였다.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어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을 때 가장 흥미로운 학문이 사회학이었다. 물론 초중고의 사회교과와 사회학은 성격상 차이가 있긴 하다. 그러나 사회학이 재밌는 학문이라면 그 하위영역으로서 지리든 역사든 정치든 사회문화든 사회 공부 또한 학생들에게 흥미롭게 다가가야 하거늘 현실에 있어 그 반대로 가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것을 사회과의 교육과정이 학생들 삶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머리 쓰기, 몸 쓰기), (이론, 실천), (삶, 교육)이 따로 놀면 공부가 어렵고 지겨울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사회 공부가 어려운 이유로 교육과정이 삶과 동떨어져 있는 탓도 있지만, 거꾸로 학생들의 삶이 ‘사회적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탓도 크다. 4학년 사회 교과서에 ‘지방자치’가 등장하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의 삶에서도 지방자치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실물적인 경험을 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공부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교대나 사대에서 배운 교육학 공부도 그렇다. 그때는 그렇게 어렵고 지겨웠던 교육학이 교사가 되어 다시 공부할 때는 쉽고 재밌게 다가오는 이유는 삶과 공부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과 교육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인식론적 효율성을 위해서도 그러해야 하지만, 가치론적(윤리적) 차원에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교육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당위성이 학생보다는 교사의 몫인 것은 물론이다. 교사의 교육행위는 교사의 삶과 따로 갈 수 없다. 의롭지 않은 삶을 사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정의를 강변한들 학생들이 뭘 배우겠는가?
교사 또한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하는 존재다. 교사는 특정 시기 특정 국면에서 자신이 학습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논한 삶과 배움의 통합적 속성상, 교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체득하지 못한 지식에 대해 제대로 된 지적 역량을 갖지 못하기에 그는 유능한 수업을 학생들에게 펼쳐주지 못한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살아보지 않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없다. 독재적인 학교장 밑에서 교무회의 때 부당한 지시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불만도 품어 보지 않고서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의 교직 삶을 사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삶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 못한다. 교사에게도 (삶, 교육)은 함께 간다. 바른 삶을 사는 교사가 바른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


Theory is one thing and practice is another. 고교시절 영어 공부할 때 익혔던 한 문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만큼 딴에는 그것이 명문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통합적 시각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문장은 문제가 있다.
흔히 “이론과 실제는 별개의 문제”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론과 실제, 이론과 실천은 함께 나아간다. 이론은 언제나 실천의 이론이며, 실천은 언제나 이론의 실천인 법이다. 이 같은 이치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생각하면 명백해 진다. 과학자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실험을 통해 마침내 어떤 과학적 원리를 발견해 낸다. 반복되는 실천이 이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기존의 이론적 지식을 근거로 가설을 설정하고서 실험을 시도할 수 있다. 그의 관념 세계 속에 축적된 이론적 자산을 근거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실천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론, 실천)의 통합적 속성을 생각할 때 교육과 관련한 이슈나 담론은 교육 실천과 유리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교육담론 주조는 교육학 교수들에게 그리고 교육실천의 현장 교사들의 몫으로 이분화 해서 경계를 세워 버린다. 그 결과 현장교육 현실과 동떨어진 이런저런 교육정책과 매뉴얼이 시달되어 교사들의 한숨과 원성을 자아낸다. 교육의 이론 생산 영역과 실천 영역이 동떨어져 있어서는 교육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존 듀이가 실험학교에 뛰어 들어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냈듯이 교육학 교수들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현장 교사들은 더 나은 전문적 실천을 위해 이론 섭렵에 힘 써야 할 것이다.




동전의 양면 혹은 양극성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에서 구름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자. 흰구름이 비구름이 되고 땅에 내린 비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흰구름이 된다. 이처럼 외형상 서로 대조적인 두 속성은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는 ‘동전의 양면’이란 은유법을 즐겨 쓴다.
통합적 시각이란 사물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앞면 뒤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립적인 속성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두 속성은 흰구름이 비구름으로 변하는 것처럼 일정한 조건이 구비되면 상호 전화(transformation)가 이루어진다.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두 속성이 하나는 밝은 측면을 다른 하나는 어두운 측면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대립적인 두 속성을 가치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석의 (N, S), 전기의 (+, -)라는 각각의 극성을 호불호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인간 삶에서 어둠도 빛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24시간 내내 밝기만 한 백야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문학소녀에게 비구름은 재앙일지언정, 오랜 가뭄에 근심하는 농부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교사 앞에서는 똑똑하고 리더십이 강한 모범생이 교사 부재중의 교실에선 또래들에게 독재자로 군림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이런 아이에게 어떤 배신감과 함께 아이의 이중인격성을 떠올리며 경악하곤 한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을 생각하면, 인격이라는 게 본디 이중적인 법이다. 통합적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교사라면, 모범생이 지닌 빛나는 리더십의 자질 이면에 독재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처음부터 봤어야 한다. 그런 교사는 문제의 장면을 접하면서 ‘이중인격’ 운운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아이의 훌륭한 자질 이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적 요소에 대한 각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아이를 더욱 훌륭한 재목으로 단련시켜 갈 것이다.
우리가 모범생의 양면성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른바 문제아에게서도 일견 부정적으로 보이는 속성 이면에 빛나는 자질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폭력성이 강해 쌈박질을 일삼는 아이가 있다면, 그는 뒷골목으로 향할 수도 있고 복싱체육관으로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사의 작은 실천에 따라 달라지는 이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는 종이 한 장의 차이지만, 훗날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교사의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소임이 이게 아닐까 싶다. 즉, 현재 눈앞에 부정적으로 비친 아이의 어떤 (-)극성을 그에 상응하는 (+)극성으로 전화시켜 새로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





사진 속의 세 인물들에겐 어떤 비범한 공통점이 있다. 상식적 의미에서 그 비범함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어서 당대의 이웃들로부터 이들은 ‘미치광이’ 혹은 ‘비정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들을 천재 혹은 영웅으로 일컫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에게 내재된 광인의 속성과 천재적 속성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양극성(兩極性, bipolarity)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점이다. 첫 번째 인물은 알다시피 비운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두 번째는 퓨전재즈 그룹 웨더 리포트의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이다. 자코는 무대에서 스스로 자신을 “세계 최고의 베이시스트 자코”라고 소개할 만큼 교만한 악동으로 평이 나있는데, 그가 세계 최고의 베이시스트 중의 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빈센트와 자코는 공통적으로 젊은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했는데, 빈센트는 권총자살로 자코는 술 취한 상태에서 나이트클럽에서 행패를 부리다 맞아 죽었다. 두 사람은 숱한 반사회적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는데, 이들은 흔히 조울증이라 일컫기도 하는 ‘양극성 장애 bipolarity disorder’를 앓고 있었다.
양극성 장애에서 ‘양극성 bipolarity’이 통합적 인식론에서 말하는 양극성과 같은 의미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빈센트는 양극성 장애가 극에 달했을 때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놀랍게도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이 가장 훌륭했다고 한다. 그림 속의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으로 돈 매클린의 노래로도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또한 빈센트가 요양병원에서 그린 것이다. 위대한 재즈 뮤지션 자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동료 뮤지션들은 말한다. 미치광이 자코가 없으면 그의 훌륭한 음악도 없다고.
세 번째 인물은 수영 역사 최초로 올림픽 8관왕을 달성한 수영천재 마이클 펠프스이다. 펠프스는 학창시절 ADHD로 또래집단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다. 주의력(Attention)-결핍(Deficit)-과잉행동(Hyper active)-장애(Disorder)라 하는데, 아마도 통합적 시각을 가졌을 어느 선생님은 펠프스의 넘쳐 나는 에너지를 어느 수영에 쏟도록 이끌었고 마침내 그는 오늘 우리가 아는 수영 영웅이 되었다. 학교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아이들 가운데 혹 빈센트와 자코, 그리고 마이클 펠프스가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는 내성적이어서 문제다?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 때 가장 많이 듣는 하소연 가운데 하나가 “우리 애는 내성적이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아이가 내성적이라면 그건 걱정거리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화답한다.
통념과 달리, 내성적 성향은 말 수가 적은 것과 별 관계가 없다. 코미디언 가운데도 내성적인 사람이 왜 없겠는가? 찰리 채플린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말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 말이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들 가운데 친목회 때 활발히 떠드는 사람 치고 직원협의회 때 말 많은 사람 잘 못 봤다. 반면, 평소에 말이 잘 없다가도 사회적 갈등 사태에서 누군가 의로운 목소리를 내야할 때 용기 있게 조곤조곤 입을 떼는 사람이 있다. 아마 이런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 이처럼 내성적인 사람은 이 사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다.
시인 릴케는 젊었을 때 군인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도무지 자기 정체성과 맞지 않는 군인생활에 혼란을 겪다가 중퇴했다. 내성적이란 말에서 내성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內性’이 아니라 ‘內省’임에 주의해야 한다. 말 그대로 “안으로 들여다보는 성향”이고 자기 삶을 성찰하는 자세가 내성적인 것이다. 군인인 사람에게 내성적인 성향은 불편할 것이다. 군인에게 요구되는 성향은 삶을 성찰하는 철학적 자세가 아니라, ‘돌격 앞으로!’의 명령이 떨어질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적진을 향해 총 들고 달려가는 자세일 것이다.
릴케가 만약 육군사관학교에 머물러 군대에 말뚝 박았더라면 문학사에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인류의 정신문화를 풍성하게 한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군인정신으로 무장하여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우리 삶은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다운 삶의 자세는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다운 삶은 오직 성찰을 통해 가능하며, 그것은 내성적인 자질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내성적이라는 사실로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에게 이런 확신을 주면 좋을 것이다. 통합적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교사는 미운 오리새끼의 이면에 있는 백조의 자질을 통찰하여 실의에 빠진 아이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건넬 수 있다.




나오는 말


흰구름이 비구름이 변해 가는 노랫말로부터 지금까지 교육 현상 속의 몇 가지 이슈로 (비움, 채움), (흥미, 도야), (삶, 교육), (몸 쓰기, 머리 쓰기), (이론, 실천) 등의 범주쌍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논하였다. 모든 사물은 대립적인 두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속성을 연관의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이 사물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대립적이라는 이유로 각각의 범주들을 따로 따로 생각하는 양자택일의 사고에 익숙해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배움에 흥미를 잃으며, 교육이라는 것이 삶과 동떨어져 이루어짐에 따라 지겹고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위선과 허구를 답습하는 관념의 놀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이 즐거움이 되고 학교가 희망의 교육공동체로서 그 본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주체들이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교육과 관련한 범주쌍을 통합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인식론적 전환을 꾀할 필요가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모범생에게 내재된 빛나는 자질이 어느 순간 그에 상응하는 부정적 속성으로 전화될 가능성이 상존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대립물 상호 전화’의 이치는 우리가 문제아라고 일컫는 예민한 학생들에게도 적용될 것은 당연하다. 사실, (리더십, 독재성)과 (폭력성, 과감성)에서 각각의 대립적인 범주 사이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와도 같다. 조니 미첼의 노랫말에서 보듯, 우리로 하여금 동화 같은 환상에 젖게 한 흰구름이 갑자기 비구름으로 변하듯이, 리더십이라는 속성이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독재성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의 입장에서 독재성은 없애고 리더십의 속성만 간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시도일 뿐이다. 다만, 이 두 상반된 속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현재 빛나는 자질이 어느 순간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의 경우 ‘권위’라는 것이 그러하다. 교사는 권위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교사가 권위를 잃으면 교육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귄위(authorit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다르다. 교사는 권위주의자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사가 교사이기 위해서 그는 권위를 지켜야만 한다.
그러면 리더십과 독재성,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는 정확히 뭔가? 어디까지가 리더십 혹은 권위이고 어디부터가 독재성 혹은 권위주의인가? 이에 대한 획일적인 답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이를테면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교실이 있고 담임교사가 그걸 제압할 객관적 역량과 의지가 있다면 그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그 보다 더 한 독재성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대립적인 두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에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법이다. 또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은 늘 왔다갔다 상호 전화의 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늘 우리는 사물에 대한 온전한 이해력을 갖기 위해 대립적인 두 속성을 함께 바라보는 ‘Both Sides (Now)’의 시각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지금 교사로서 내가 취하는 포지션이 바람직한 권위인지, 불필요한 권위주의인지 늘 돌아보는 성찰적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사물을 향한 우리의 사고는 (좌, 우), (진보, 보수), (강경, 온건), (이성, 감성) 등의 양극단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고정된 사고는 금물이다.

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늘 바르르 떨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침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참을 떨다가 마침내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한 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 난 나침반일 뿐이다. -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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