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자유의지란...

리틀윙 2017. 2. 19. 10:39

 

 

 

>>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뇌도 우주의 일부이고, 의식은 뇌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할까요? <<

 

일종의 삼단논법이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대전제와 “뇌도 우주의 일부이고, 의식은 뇌의 산물이다.”는 소전제를 제시한 뒤, 결론부에서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말함으로써 대전제의 명제가 오류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글쓴이는 명망있는 물리학자로서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자유의지의 물리학’이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저런 논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물리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리고 결정론적 세계관을 지지할 생각도 없다.
다만, 철학적으로 위의 삼단논법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대전제에 대해선 별 이의가 없다. 문제는 소전제와 결론부를 연결 짓는 맥락이다.

 

먼저, 소전제의 오류.
의식이 뇌의 산물이라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유물론’에 해당한다.
의식이 두뇌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뇌라는 물질적 조건이 다르면 의식의 퀄리티도 달라지는 것이다. 파충류와 영장류는 두뇌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의식 수준도 다르다. 또 같은 영장류라도 이를테면 치매에 걸린 사람과 건강의 청년의 의식은 같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의식이 뇌의 산물이라는 관점에 대해 별 이의 없다. 이 관점의 문제는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점에 있다.

 

인간의식은 결코 단순한 두뇌작용의 산물이 아니다.
두뇌와 의식 사이엔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매개가 이루어진다.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관계맺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the ensemble of social relationship)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구체적인” 예를 수만 가지 들 수 있지만, 간단히 남녀 간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의식)의 예를 들기로 하자. 보봐르는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진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 길들여짐의 정도가 시대별로 사회별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고대사회에 노예인 여성과 귀족 여성이 갖는 의식이 같을까? 둘 다 치매와 무관한 건강한 청년인데 일베 청년과 좌파 청년의 의식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차이가 두뇌(=물질)의 퀄리티(이를테면 286과 펜티움) 차이일까?

 

이렇듯, 소전제에 중대한 오류가 있으므로 위의 삼단논법은 문제가 있다.

 

자유의지라는 것도 그렇다.
물질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있는 한 예를 소개하겠다.
어떤 인류학자가 문명과는 거리 먼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 들어갔다. 그 부족은 가부장제가 아주 심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산 채로 남편과 함께 땅 속에 들어가 남편 수발을 해야 했다. 말하자면, ‘순장제’가 존재하는 사회였다. 남편을 뒤따라 죽으려는 어떤 부인을 인류학자가 설득하여 두 사람이 함께 달아나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 외진 곳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인이 묵은 자리에 쪽지가 남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기부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자유의지’란 이런 것이다! 자유의지는 시대정신 속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시대정신은 물질세계의 존재양식(마르크스의 용어로는 '생산관계')에 말미암는다.
자유의지조차 두뇌라는 물질이 고도로 발달한 결과로 가능한 인간의식의 산물이다. 즉,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은 그저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철저히 물질적 조건에 말미암는다. 즉, 조건화(conditioning) 되는 것이다.

 

요즘 폭염이 계속되니 호텔업계가 호황을 이룬다고 한다. 하룻밤에 몇 십만원씩 하는 방에 예약이 꽉꽉 차있다고 한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인간 자유의지의 결과인 것이다. 문제는 그 자유의지가 만인에게 열려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소말리아 아이들이 밥을 굶을 자유를 자유라 할 수 있을까? 그걸 자유의지니 뭐니 하면 미친놈일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부자들도 다리 밑에서 잠을 잘 자유의지를 품겠지만, 홈리스에겐 몇 십만원짜리 방에서 잘 자유의지를 발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란 이런 것이다!

 

초등교육자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을 때 심한 불편을 느낀다. 바로 아나톨 프랑스의 관점에서이다. 어머니는 집 나가고 없고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같이 사는 여자 아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자기 꿈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거라고 말할 때 그런 불편에 사로잡힌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는 명품관이나 백화점, 아니 하다 못해 이마트에 장 보러 갈 때도 느낄 수 있다. 거무접접한 피부색의 외국인 노동자부부가 장바구니 들고 이 화려한 자본주의 소비시장에 진열된 상품들 앞에서 경탄하지만 이내 그 놀라움이 절망감으로 바뀐다. 소시민인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 눈을 현혹하는 탐스런 물건들이 많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우리 통장의 잔고라는 한계에 따라 조건화된다. ‘선택의 자유’라는 말은 소말리아 난민이 명품관에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는 말 만큼이나 위선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허구적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OECD 내에서 부동의 자살률 1위를 자랑하는 이 사회에서는 30분마다 한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동물계에선 볼 수 없는 인간 자유의지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우리가 아는 사전적 의미의 ‘자유’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지금까지 여러 예를 통해 논했다.
요컨대, ‘자유의지’는 물질적 조건화의 결과인 것이다. 물질세계와 무관한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지적 사기다.

 

아, 물론 물질적으로 험난한 여건 하에서도 굳건한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인간승리를 이룬 사례도 가끔 있는 만큼, 인간 삶이 물적 조건의 영향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고 볼 수는 없다. 물적 조건을 절대화 하는 입장이 ‘기계적 유물론’이라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이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이다. 둘 다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좀 전에 포스팅한 내 꼴통 제자 녀석의 경우, 객관적으로 불우한 형편에 처해 있으나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자질이 비범하여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대성할 재목이나...... 늘 저렇게 게임에 몰두할 뿐 자유의지를 발동하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결론은, 물적 조건과 자유 의지 가운데 둘 중 하나를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게 내가 늘 역설하는 통합적 세계관이다. 서로 대립되는 두 측면(범주쌍)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