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설명식 수업

리틀윙 2015. 9. 19. 11:32

 

 

맨 첨에 교단에 섰을 때부터 27년째 이르는 지금까지 나의 수업 스타일은 ‘설명식’이다.

어떤 경우에도 교육의 성패는 교사의 지적 역량에 따라 좌우된다. 요즘 ‘e-러닝’이니 뭐니 하면서 수업시간에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뭘 배워가는 시대라며, 이 첨단 시스템 수업에 적응 못하는 교사는 도태될 거니 뭐니 하는 협박과 사기가 교단에 횡행하고 있다. 이걸 한 방에 보내는 멋진 이론이 있다. 비고츠키언으로 내 책에서도 다룬 ‘역동적 평가 dynamic assessment'라는 개념을 개발한 포이어스타인(Feuerstein)의 ‘매개된 학습경험 Mediated Learning Experience(MLE)’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지면으로 다루겠지만, 간단히 “아무리 좋은 교육환경에 노출된들 교사(부모)가 개입되지 않으면 아동의 학습 성과는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학생중심의 발견학습이나 협동학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내가 설명식수업주의자(?)라고 해서 이 방식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지적 오류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치체계(이를 ‘범주쌍’이라 한다)에서 “양자택일”하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순수한 설명식 수업이나 순수한 발견학습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교과에 따라, 학습자의 역량에 따라, 교사의 역량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오수벨은 학습자가 어릴수록 교사의 역량이 뛰어날수록 설명식 수업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설명식 수업이 비판을 받는 것은 학생은 침묵하고 교사 혼자 떠드는 교회목사 설교 식으로 흐를 경우다. 나는 내 수업이 이런 방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 그 참여는 ‘질문’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교사의 설명 뒤에 학생의 질문이 뒤따르지 않는 설명식 수업은 실패로 간주해야 한다. 설명식 수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스토리텔링이 흥미가 있어야 한다. 학생의 지적 자극을 유도하지 못하는 수업은 ‘설명’이 아니라 ‘설교’다. 이런 수업에서 학생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질문’이나 ‘맞장구(호응)’가 아니라 ‘하품’일 것이다. 설명을 재밌게 하면, 아이들의 질문이 터져 나오는 게 정상이다.

이곳 다부에서는 이 수업이 잘 된다. 특별한 학교시스템 상 이 아이들은 나쁘게 말해 싸가지가 없고 좋게 말해 교사-학생 간의 격이 잘 없는 편이다. 그래서 수업 중에도 아이들이 과감하게 마음의 문을 연다. 특히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강한 녀석들이라, 질문이 너무 많아 감당을 못할 지경이다. 그래서 나의 노동강도(이런 말 쓰기 싫다만)도 빡세진다. 하나, 이렇게 교사를 괴롭히는 경우라면 이건 즐거운 비명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설명식 수업을 지향하는 특별한 개인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내 아이들을 ‘철학적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해서, 나는 이따금씩 교과서를 떠나 아이들을 초등학생 수준 이상의 지적 여행을 데려간다. 우리 반 아이들은 변증법에 관해 (당구 수지로 말하면) 80정도는 된다. 그리고 수시로 교육학 이론을 설명한다. 나는 뭐든 이론적으로 무장 돼야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약간 어려운 문제를 만나 쉽게 포기하는 아이를 위해 “머리도 근육처럼 쓸수록 발달한다.”는 ‘심근’ 개념을 세뇌시킨다.

 

하나의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다!
비고츠키 선생으로부터 배운 가장 심오하고 멋진 말이다. 명저 [생각과 말]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인간 의식(사고)의 발달은 말의 발달과 비례한다.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어떤 낱말이 포착될 때, 나는 그 단어를 교실 정면의 화이트보드 한 쪽 구석에 기록한다. 나는 이것을 ‘개념어’라 일컫는다. 내가 1년간 적은 이 개념어만 아이들이 이해해도 나의 교육은 대성공이라 생각한다. 이 학교에선 학부모들이 이런 수업을 권장하니 나로선 정말 신명나게 가르칠 수 있다. 다부는 창의적인 교사가 자신의 특이한 교육설계를 맘껏 펼칠 수 있는 멋진 학교다.

어제 1학기에 적었던 개념어들을 아이들에게 복습시켰다. 의외로 많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 중 어려운 몇 개는 다시 설명한 뒤 저렇게 남겨 둔다.
어제 놀랐던 것은, ‘조건반사’란 개념을 몇몇 똑똑한 아이들이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려운 개념어의 경우 브레인스토밍 식으로 이 개념과 상관되는 낱말을 뭐든 말해보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 입에서 “코끼리(서커스에서 코끼리 훈련시킬 때 조련사가 손뼉을 치는 동시에 코끼리 앞발이 위치한 바닥에 전기쇼크를 넣어서 ‘앗 뜨거’ 하면 발을 번쩍 들도록 하는데, 이것이 반복되면 나중엔 전기를 넣지 않고 손뼉만 쳐도 발을 들게 된다.)”, 쉐퍼드-쇠고기, 종(bell) 등등의 말이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준비’가 된 것을 보고서 심화학습에 들어갔다. ‘조건화’ 개념을 설명했다. 조건화 대신 ‘길들이기’란 말을 쓰면서, 우리 삶이 조건반사로 점철된다는 것. 다른 학교에선 학교 종이 치면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가는데 우리 다부에선 종이 없는 이유가 바로 아이들을 조건화 시키지 않고 ‘자율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는 것...

 

하나의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다.
A word is a microcosm of human consciousness.

교육은 아이들의 정신(의식)을 발달시키는 사업이다.
정신의 발달은 단어의 이해에서 시작된다. 나의 용어로는 ‘개념어’다.

 

- 201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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