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1, 전교조경북지부 주최로 열린 평가 관련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1. 문제 제기
평가와 관련하여 몇 해 전 내가 겪은 에피소드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2008년, 나는 G시에서 근무연한을 다 채운 터라 인근의 군 지역으로 희망 내신을 냈다. 내가 발령 받은 학교는 20학급 규모의 면지역 학교였다. 2월 봄방학 중에 학교를 찾아가서 희망 업무와 학년에 관해 교감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학교 측에서 내게 영어교과전담을 맡아주기를 요구해서 수락했다. 영어는 내가 가장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교과 중의 하나다.
때는 이명박 정부가 막 출범한 시기로서 이른바 ‘어린쥐(orange)’로 대변되는 영어교육의 광풍이 학교현장을 휘몰아쳤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영어교육에 대한 막연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영어교육을 맡은 담당자로서 변변찮은 사설영어 학원 하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시골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처방은 ‘영어노래’였다.
지금은 초등영어 수업시수가 주당 2~3시간(3,4학년은 2시간, 5,6학년은 3시간)이지만, 그때는 주당 1~2시간이었다. 주당 1~2시간의 학교 수업만으로 학생들이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는 없다. 그럴 바에야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이 영어에 대한 관심과 흥미 그리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영어노래는 이런 요건들을 충족시켜주는 좋은 학습 매체다. 아이들은 꼬부랑 영어를 말로 따라 하기는 기피해도 노래로 따라 하기는 즐긴다. 이 학습활동을 즐겨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소득은 영어발음의 정확성이고 이로부터 생애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이 낯선 외국말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나는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2/3는 교과 진도를 나가고 나머지 1/3은 내가 학년성에 맞게 준비한 영어노래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이 시간을 무척 즐겼다. 개인적으로 나는 팝송이나 미국 포크송에 대한 약간은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으며, 기타 연주와 함께 제법 운치 있게 영어노래를 읊조릴 수 있는 재능을 지닌 편이다. 6학년 아이들이나 3학년 아이들도 이 시간에는 수업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나의 창의적인 영어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아름다운 음악과 뮤지션의 삶, 교훈적인 노랫말을 통해 영어와 음악, 서구 문화와 역사 그리고 철학을 배워갔다. 6학년 수업에서 톰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배울 때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혹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토론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좋게 봐서 창의적인 수업이지만, 어떻게 보면 교과 교육목표를 이탈한 ‘제멋대로 수업’이라 할지 모른다. 그 시절 혹 누가 나의 수업을 지켜봤다면 그런 비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수업이 권장되고 있으니, 나의 영어수업은 융합형 교육과정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방법이 어떠하든 교사가 신명나게 가르치고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는 교실에서는 어떤 식이든 유의미한 교육적 결실이 맺어지기 마련이다. 당면한 학년교육과정의 목표는 빗겨갔을지언정, 멀리 볼 때 교사의 특수한 지적 자질과 재능을 기초로 재구성하여 기획한 나의 창의적인 수업은 영어학습과 관련한 학생들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의 이 확신은 몇 년 후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나를 만났을 때 건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 말로는 중학교에서나 고등학교에서도 그 때 만큼 흥미 있는 영어수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확신이 한 때 쓰디쓴 아픔을 마주하면서 와르르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영어심화연수과정으로 교원대에 6개월 파견을 떠났다. 그런데, 2학기에 돌아와 보니 우리 학교가 ‘학력향상중점’학교로 지정받아 있었다. 황당하게도 그 이유가 아이들의 낮은 영어점수 때문이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땐 연말에 도학력고사를 치렀다. 나는 영어수업을 열심히 했다. 초등교사로서 누구보다 영어에 자신이 있었고 또 누구보다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내가 받은 ‘성적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른 이유는 없었다. 도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밀고 간 ‘창의적인 수업’이 문제였다.
평가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2. 평가의 교육적 의의
이 글에서 나는 ‘시험’과 ‘평가’를 구별해서 쓰고자 한다. 평가는 교육실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성공적인 교육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교육 실천의 한 프로세스이다. 진단평가, 형성평가, 총괄평가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시험의 형식을 취할 때 여러 가지 반교육적 폐단을 파생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서열을 가리기 위한 시험”을 말한다. 시험과 평가가 구별되는 지점은 선발이나 줄세우기를 목적으로 하는가의 여부이다. 그 밖의 측면에선 시험과 평가를 굳이 구분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교육은 학생을 성장시키는 사업이다. 유기체의 성장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교육의 장에서 학습자는 평가라는 계기를 통해서 자신의 오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깨우쳐간다. 평가는 행동의 수정을 위한 강력한 피드백의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가는 반드시 지필고사나 수행평가의 형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위 수업시간의 말미에 교사가 질문하고 학생이 응답하는 것도 하나의 평가일 수 있다(형성평가).
모든 교육은 교수와 학습이라는 두 계기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평가를 통한 오류 수정의 효과는 학생 외에 교사에게도 더 나은 가르침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사들은 자신의 교수법이나 수업실천이 얼마나 적절한가의 여부에 대해 오직 학생의 반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교사의 이러한 자기성찰은 일련의 교육 과정 가운데 평가 단계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총괄평가의 예를 들면, 교사가 시험지를 채점함에 있어 특정 문항에 대한 학생들의 오답을 접할 때, 처음 한두 학생의 오류를 대할 때는 그 학생을 탓하지만, 동일한 오류가 계속 되풀이 되어 지각될 때는 정작 문제가 있는 쪽은 학생들이 아니라 그 내용을 가르친 교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육은 교사-학생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교육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가 또한 결코 일방적인 교육실천이 아니다. 우리가 가르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으며, 교사와 학생 공히 평가라는 계기를 통해 숱한 시행착오에 힘입어 더 나은 학생, 더 나은 교사로 동반 성장해가는 것이다. 요컨대, 교사에게 평가는 더 나은 수업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모니터’로 기능하는 교육실천인 것이다.
3. 평가, 어떻게 치를 것인가?
평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평가를 “지향”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떤 평가를 “지양”할 것인가 하는 것에서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시험을 통한 서열화와 점수화의 학교문화를 지양해야 한다.
계량화 즉, 점수로 환산되는 모든 시험은 줄세우기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처럼 ‘선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초등학교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경우에도 점수화 되는 순간 서열 매김은 불가피하다. 교사는 줄을 세우지 않아도, “나는 전과목 5개 틀렸는데 너는 몇 개 틀렸니, 또 너는?” 하는 식으로 아이들 스스로 서열을 매기기 때문이다.
줄세우기와 점수화를 방지하기 위해 형성평가(쪽지시험)조차 총 문항수를 7로 한다든지 해서 점수로 환산이 안 되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평가 후 우수학생을 선별해서 시상하거나 하는 학교 문화를 고쳐나가야 한다.
일제고사의 형태의 시험을 지양해야 한다.
서두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유능한(?) 교사가 남다른 열정과 창의성을 발휘해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교사의 수업에 흥미를 갖고 몰입하였는데 왜 시험 점수는 낮게 나왔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교육실천의 주체와 평가의 주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고사의 가장 심각한 폐단이 이것이라 생각한다. 비단 도학력고사 뿐만 아니라 학교차원에서 치르는 시험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옆 반 교사와 나의 수업 내용이 같지 않은데 똑같은 평가도구로 학생과 교사의 역량을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교육의 원리상, 평가는 교수행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땅히 가르치는 이의 몫이어야 한다. 교육이 교육으로 성립하기 위하여 이 원칙은 꼭 지켜져야 한다. 일제고사 시스템 하에서는 창의적인 수업을 할수록 평가 결과는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체제 하에서 최선의 학습방법은 드릴(drill)이며, 최선의 교수방식은 문제집 풀이 수업이다.(이명박 정권 5년간 이 땅의 6학년 1학기 교실에서는 이렇게 수업했다!) 교육청 장학사들은 현장교사들에게 교과서를 떠나 다양한 학습자료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수업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도학력고사 문제는 교과서 위주로 출제한다. 이를테면, 국어 교과서 속의 글이 그대로 시험지 속의 지문으로 등장하는데, 창의적인 수업을 받은 아이들의 점수가 잘 나올까?
무릇 교육은 교사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국가수준이나 지역수준에서 만들어진 교육과정은 교실차원에서 개별 교사의 손에 넘어간다. 이를 교실수준의 교육과정이라 할 때, 이 교육과정의 수는 전국의 교사 수만큼이나 많다. 교사는 주어진 교육과정을 천편일률적으로 가르치기보다 지역사회와 학습자 그리고 무엇보다 교사 자신의 특성에 맞게 최적화된 상태로 재구성하여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교실교육과정의 수가 다양한 만큼 평가 방식이나 내용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평가를 ‘교사별 평가’라 일컫는다.
객관식이나 단답형 위주의 시험을 지양해야 한다.
일제고사는 객관식 시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또한 일제고사가 줄세우기를 근간으로 하는 것과 관계있다. 현재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치러지는 대부분의 시험이 그러하며, 국가차원에서 실시하는 모든 표준화시험이 객관식으로 치러진다. 평균 0.01점 사이에 내신등급이 왔다갔다 하는 체제 하에서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면 채점결과에 대한 학부모의 민원으로 학교가 몸살을 앓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민원으로부터 자유로운 초등학교에서조차 객관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객관식 시험의 가장 큰 문제점이 주어진 보기 문항 가운데 무조건 정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학생들에게 정답 선택을 강요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 학생들은 지적 능력을 기르기보다 정답을 고르는 요령을 익히며 잔머리만 키우게 된다. 찍기 역량과 지적 역량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다음 중 ~가 아닌 것은?” 이란 형태로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삶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은 정답이 없는 것들이다. 오직 철학적 사고를 통해 그 진리의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이치에 비추어 가장 바람직한 평가는 ‘논술(서술형) 평가’이다.
학교에서 치르는 많은 시험들은 교사와 학생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형국이다. 교사는 정답을 꼭꼭 숨겨 놓고, 아이들은 별 가치도 없는 단편적인 내용의 정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험.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오픈북 테스트’로 시험을 치르는 게 바람직하다. '오픈북'은 정보화시대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정보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학습력을 판가름해야 한다. 잡다한 지식은 ‘네이버’나 ‘구글’에 다 들어있는데, 그걸 외우기 위해 왜 우리 아이들이 밤늦도록, '야자'니 뭐니에 시달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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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안적 평가 : 역동적 평가
평가의 가장 큰 난점은 교사가 학생의 역량을 얼마나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혹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하면서 학생을 멋대로 재단해 오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평가는 교육 실천 속에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과정의 일부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평가는 교사에게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며, 학생의 성장을 돕기 보다는 학생에게 학업스트레스를 가하며 학습의욕을 좌절시키는 역기능을 노출해 왔다.
지금 소개하는 이 역동적 평가는 바로 이러한 난점과 맹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신선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하의 내용은 나의 졸저 [교사가 교사에게(2015)]에 실었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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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을 맞아 생활기록부에 학생 발달 사항에 대해 그간 우리 교사들이 관찰하고 측정해온 결과를 입력하면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옵니다. ‘이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 만물의 기본 속성이죠.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평가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변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변하기 때문에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금언은 개인의 자질 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수행평가라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정삼각형 그리기’라는 평가문항에서, 5월 평가시점에는 성취수준에 도달했던 학생이 학기말인 지금도 그러하리라는 보증이 있을까요? 안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영어 같은 교과에서는 3월초 1단원에서 익힌 단원 핵심문장을 학기말에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평가 시점에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학기말에는 도달해 있는 학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학생의 평가결과는 ‘미흡’으로 매겨져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기록되고, 학기말 또는 학년말 통지표에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정삼각형 그리기 기능이 미흡함”으로 학부모에 통보됩니다.
학생 평가와 관련하여 이러한 불합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존의 평가체제가 “현재의 학생 발달 수준”에 초점을 맞춰 치러지는 ‘정적 평가(static assessment)’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비고츠키 학자들에 의해 연구·개발해오고 있는 역동적 평가(dynamic assessment)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동적 평가와 정적 평가가 어떻게 다른지, 정적 평가에 비해 역동적 평가가 어떤 장점이 있는지 기성 이론에 제 생각을 곁들여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역동적’이니 ‘정적’이니 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보통 ‘역동적’이란 낱말은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는”이란 뜻으로 쓰고 ‘정적’은 그 반대의 상태인 ‘고요한’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역동적 평가’와 ‘정적 평가’는 활발함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역동적’이란 움직이는 성질 즉, 운동성을 말하고 ‘정적’이란 운동성이 결여된 상태로서 ‘정지된’ 또는 ‘고정된’의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둘의 차이는 동영상과 스틸 사진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정적 평가는 특정 시점에 산출된 학생의 일시적 역량을 측정하는 점에서 매우 협소한 정보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반면, 역동적 평가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서 학생의 점진적 발달 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합니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인간적 자질이든 지적·심동적 역량이든 한 인간의 진면목에 대한 평가는 오직 역동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정적 평가는 어린 학생이 성인의 지원과 보조 없이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만을 측정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발달된 역량을 측정하는데, 비고츠키 학자들은 이런 평가는 근접발달영역의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 정보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학생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역동적 평가는 학생의 독립적 수행 능력과 지원을 받아 할 수 있는 능력 모두를 밝혀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측정할 때만이 올바른 평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실감나는 한 예로 보드로바&리옹(p.92)은 평균대 위를 걷는 능력에 관한 두 여자 아이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아이는 모두 혼자 힘으로는 평균대를 걷지 못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는 교사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지만 다른 아이는 교사의 도움을 받고서도 걷지 못합니다. 현재의 독립적 수행능력만을 측정하는 정적 평가에 따르면 두 아이 모두 수행능력이 ‘제로’에 해당하겠지만 역동적 평가 결과는 다릅니다. 상식적으로 두 아이를 동일하게 0점 처리하는 것은 불합리하겠죠. 이처럼 역동적 평가는 상식에 보다 가까운 진단이라 하겠습니다.
정적 평가는 학생의 독립적인 역량을 측정하기 때문에 학생 상호간은 물론 학생과 교사의 여타한 상호작용까지도 차단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학생이 시험 문제의 뜻을 몰라서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도 금기시하곤 합니다.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평가라면 몰라도 초등학교에서 그런 점이 공정성 시비로 거론되는 자체로 그 평가 방식은 교육적이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사실, 평가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은 아이들의 일상생활에서 잘 접하기 힘든 낯선 문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시험 문제를 많이 풀어 보지 않은 어린 학생들은 문제의 뜻을 몰라서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동적 평가에서는 학생이 지닌 학습 잠재력을 어떻게든 최대한 펼치도록 돕기 때문에 공정성의 시비가 발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학습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호한 물음으로 그들이 지닌 심층적인 잠재적 능력을 측정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1988년 제 초임발령 때 겪은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자가용이 드물었던 그 시기에 시골에서는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DH-88(일명 팔팔)이라는 오토바이가 각광을 받았습니다. 배기량이 88cc밖에 안 되는 팔팔은 기존의 125cc 오토바이에 비해 몸체도 가벼울 뿐더러 시동이나 기어 조작이 간편해 누구나 손쉽게 탈 수 있어서 시골 집 치고 이 오토바이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팔팔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면허여서 경찰 측의 입장에선 큰 골치였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서 이들에게 면허를 부여해주기 위해 간편한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응시자들의 대부분이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는데 이 분들 가운데 문맹자도 있고 또 글을 아는 분들도 “다음 중 ~가 아닌 것은?”이라는 시험지 문체에 익숙치 않으셔서 절대 다수가 낙방을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험 감독을 하던 경찰관이 문제를 읽어주는 것은 물론 물음의 문맥과 출제자의 의도를 구두로 어르신들에게 안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역동적 평가’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어르신들이 대부분 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이 시험이 공정치 못했다거나 수험생들이 면허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들은 일상에서 원동기의 운행에 관한 웬만한 지식을 실천적으로 이미 터득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정적 평가’의 엄밀한 잣대를 적용해 운전면허를 부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동적 평가도 몇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닙니다. 그 가장 큰 난점은 교육실천 상 실행의 어려움입니다. 역동적 평가는 IEP(학생 개별화 교육프로그램)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특수교육 영역 외의 일반학급에서는 전면적인 실행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또한 학계에서는 역동적 평가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읽기와 쓰기의 국한된 영역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습니다.(보드로바&리옹, 앞의 책 p.376)
그럼에도 비고츠키 학자들이 제안하는 역동적 평가 개념은 우리 학교 교육의 담지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따라서 현장 교육주체들이 역동적 평가의 의의를 되새기며 단위학교 또는 교실 차원에서 실현가능 영역을 점차 확대해가며 실천하려는 의지와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평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상식적으로 평가가 교육을 위해 존재하지 교육이 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래의 평가 체제에서는 이게 거꾸로 돌아갑니다. 학교에서 실행하는 대부분의 시험은 시험 출제자인 교사와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 간에 펼치는 집요한 숨바꼭질과도 같습니다. 선발을 목적으로 삼는 공무원 취업시험 따위라면 몰라도, 학교 평가에서 교사가 시험 문제 속에 답을 꼭꼭 숨겨 두고 학생이 힘겹게 정답을 찾는 식은 교육적으로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평가는 그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에게 더 나은 교수-학습 활동을 위한 계기로 기능할 때만 교육적 의미를 갖습니다. 학생의 서열을 매겨 불필요한 경쟁을 조장하는 시험이나 학습력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학생들을 주눅 들게 하는 시험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학업 대열에서 낙오된 학생들에게 문제 해결 의지와 성취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교육적 처방으로 최소 수준이나마 개별화에 기반한 역동적 평가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러한 평가 과정을 통해 학생은 교사의 도움을 받아 근접발달영역을 점진적으로 향상시켜갈 수 있으며, 교사 또한 개별 학생에게 특정 시점에 필요한 유용한 교수전략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가를 통해 학생과 교사가 함께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역동적 평가가 자리하기 위해서는 ‘학력’과 ‘배움’에 관한 건강한 개념이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배움 또는 공부의 목적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계에서 학생들이 가장 적게 공부를 하고서도 가장 우수한 학력을 자랑하는 핀란드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구하고 구성해가는 것”에 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핀란드 교육위원회는 PISA에서 높은 성적을 낸 이유로 ‘사회 구성주의 학습 개념’을 들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나 한국의 ‘지식 우선’을 표방하는 교육관과는 크게 다릅니다.
‘사회 구성주의 socio-constructivism’란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의미합니다. ‘사회’란 말은 ‘삶’과 동의어로 봐도 무방합니다. 아동은 현재의 삶에서 부모나 교사,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의 의미를 구성해갑니다. 핀란드 학생들은 늘 ‘이것은 정말 배워야 할 지식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고 합니다. “공부는 왜 하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시험에 나오니까.” 라는 말은 핀란드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동이 스스로 선택하여 터득한 지식은 그대로 미래의 사회적 삶을 헤쳐 나가는 데 유용한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학교에서의 공부와 사회에서의 삶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평가 또한 아동의 현재 및 미래의 사회적 삶에 의미를 갖는 형태여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시험 문항은 어떤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다음 중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로 잘못 된 것은?
①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②땀을 흡수하기 위해
③추위를 막기 위해 ④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기서 요구하는 정답은 ④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옷가게에서 옷 고를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어린 학생들도 이 같은 이치를 뻔히 알지만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은 다르다는 것도 압니다. 삶과 공부가 따로 돌아가는 것이죠. 이건 결코 예외적이거나 극단적인 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이름으로 우리 학교에서 치르는 수많은 시험지들이 저런 식의 찍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 잘 한다는 것은 시험을 잘 치는 것을 의미하며 시험 잘 친다는 것은 정답을 척척 잘 골라내는 능력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만나는 문제들은 “다음 중 ~가 아닌 것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애플이나 삼성이라는 기업의 명운이 사원들의 ‘찍기 능력’으로 좌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지적 역량’이라 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창의적 사고에 방해되는 점에서 지탄의 대상이 될 겁니다.
평가는 교육을 위해 존재하고 교육은 또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현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즉, 학생들의 삶이 공부를 위해 희생되며, 공부의 이유는 오직 좋은 평가결과를 얻기 위함에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본말이 전도된 이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물론 힘든 일입니다. 학교는 사회 속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교육도 학교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잘못된 교육제도를 탓하며 교육의 변화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교사 한 사람의 노력으로 교육제도를 바꿀 순 없지만 학교를 바꿀 순 있습니다. 학교를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교실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나’를 바꿔야 합니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아이들을 보듬을 것이며, 부단한 자기연찬으로 전문성을 신장하여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는 교사가 낡은 교육을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누가 막겠습니까? 이런 교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학교도 바뀌고 또 교육도 사회도 바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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