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15>
아이들의 작은 일상 속에 학교의 정체성이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교육 작가를 자임하는 제가 초라한 책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작은 일상 속에서 교육의 본질적 측면을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상 자료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점심시간 급식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보다시피 질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자유분방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모습을 무질서하다고 보는 것과 자유분방하다고 보는 것 사이에서 그 학교 교육의 정체성이 구별됩니다. 우리 다부는 당연히 후자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선 이런 모습을 일탈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을 ‘방치’하는 담임교사를 무능하다고 폄하해 버립니다. 반대로, 아이들을 조용히 줄 서 있게 하는 경우를 ‘생활지도를 잘 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제가 말하듯이, 이는 교육학 개념에서 말하는 ‘생활지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생활지도의 원어인 ‘life guidance’는 ‘생활의 안내’로 옮겨야 하며,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본질적 의미는 “아이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교사의 배려”를 뜻합니다.(『교사가 교사에게』 54~58쪽)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교사가 취할 수 있는 배려는 그리 거창한 모습을 띨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비 두기 Let It Be’입니다. 물론 장난질이 심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교사의 역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소극적인 보호자의 역할으로 충분합니다.
(배가 한참 고플 때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늘어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견디기 힘든 고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짜증 내지 않고 그걸 참아내는 아이들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아이들은 저렇게 몸을 움직이고 수다를 떨면서 그걸 견뎌내는 겁니다. 때문에 학교시스템 상으로 아이들에게 즉각적으로 음식을 공급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기다리는 시간에 장난을 칠 권리도 부여해야 합니다. 저는 이걸 ‘항상성 homeostasis’이란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 『교사가 교사에게』 82~83쪽)
다른 학교에서 잘 볼 수 없는 다부의 또 다른 진풍경 중의 하나가, ‘여인 천하’의 모습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의 역학관계에선 단연 여성상위의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교사인 제가 남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 경우 여자 아이들의 거센 항의에 제가 또 고초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화면에 보듯이 우리 반에서 가장 강한 남자 아이도 여자 아이와의 힘겨루기에서 밀리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의 일상 속에는 학교의 정체성과 함께 학급의 정체성도 당연히 담기기 마련입니다. 후미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까부는 아이들은 최근에 배운 노래를 부르고 있네요. 담임을 닮아서 우리 아이들의 일상의 여백에 음악이 많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족 하나 달면,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저를 닮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근본이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보수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교사로서도 저는 ‘권위’를 중요시여기는 꼰대스러운 선생입니다. 다만 저는 “이성적으로” 아이들의 저런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아니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처음부터 제가 이런 생각을 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보수적인 제가 진보를 지향하는 것이나, 교사의 권위를 중하게 품으면서도 권위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론 덕분입니다. 교사에게 이론은... 공부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남성인 교사는 ‘페미니즘’이란 이론을 통해서만 온전한 성평등 교육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