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학생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교사

리틀윙 2015. 5. 7. 17:57

어릴 때부터 음악을 남달리 좋아했더랬습니다. 대학시절 록음악에 막 흥미를 느껴갈 때 한 그룹의 음악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록 음악 하면 보통 굉음을 연상할 만큼 시끄럽고 듣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이 그룹의 음악은 장르상 서던 록(southern rock)에 속하기 때문에 록 음악에 적응이 돼 있지 않은 사람들도 무난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교육에 관한 담론을 열면서 뜬금없이 록그룹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 그룹에 얽힌 이야기가 지금 이 글의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룹의 멤버들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레너드 스키너(Leonard Skinner)라는 이름의 체육교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학생생활지도를 맡고 있던 이 교사는 머리가 긴 학생들을 못 보아 넘겼는데, 장발단속의 단골 희생자들이 이 그룹의 중심멤버들이었습니다. 그룹의 기타리스트 개리 로싱턴(Gary Rossington)은 교사 스키너의 집요한 단속과 압박에 못 이겨 결국 학교를 중퇴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룹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멤버들은 독창적인 이름으로 그룹명을 바꾸고자 했는데, 고교시절 자신들에게 악몽과도 같았던 그 지긋지긋한 체육교사의 이름을 미국남부 사투리식 발음으로 살짝 비틀어 짓기로 했습니다. 훗날 [Simple Man], [Tuesday’s gone], [Free Bird] 등의 아름다운 곡들로 록음악의 전성기인 1970년대를 풍미한 록그룹의 이름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교사 레너드 스키너는 우리 교육자들에게 반면교사로서 어떤 가르침을 선사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기억에 남지 않는 교사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학창시절의 교사에 관해 상반된 두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스승이고 다른 하나는 레너드 스키너드처럼 불편한 추억의 실체일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경험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전자의 경우도 마음에서 우러나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강제된 학습의 결과로서 허위의식의 발로인 경우가 많을 겁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은혜 입은 스승이란 의미로서 은사(恩師)’라는 용어를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런 허구적 윤리의식을 떠나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교사에 대한 기억은 대개 부정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좋은 교사보다 나쁜 교사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 무릇 기억이라는 것이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잘 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5배나 더 강하게 반응한답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우리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좋은 교사로서보다 안 좋은 교사로 기억될 가능성이 많은 운명이라 하겠습니다.

 

교사인 제게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좋은 기억으로 자리해 계신 분들도 있지만 그 기억은 그리 강렬하지 않습니다. 반면, 초등학교 시절 한 선생님은 끔찍한 기억을 안겨다 주셔서 지금까지도 그 선생님이 제게 한 말이나 행동이 또렷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현장에 발령 받아서 그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발령을 받은 해에 신규교사를 대상으로 교육청 주관 연수회가 있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스승의 길에 들어선 신규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선배교사가 멘토로 초대되어 우리 앞에서 덕담을 전하기 위해 단상에 서시는데,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분의 얼굴과 음성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선생님이 내 앞에서 학생들에게 기억에 남는 교사가 되라는 주문을 하시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는 것이지요. 그 날 연수 내내 저는 마치고 그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했습니다. 같은 교직에 몸담게 된 제자로서 인사를 드리는 게 마땅한 도리겠으나 그러기에는 나의 정서가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모른 체 했습니다. 대신 그 분을 용서하기로 아니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날 그 자리에서 나 또한 나의 학생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존재라는 각성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제가 그 날 교육청 연수회에서 뵐 때의 그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가 됐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혹 나와 인연을 맺었던 학생들 가운데 내게 안 좋은 기억을 품고 있는 이는 없는지 생각하면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우리 교사들은 흔히 학생들에게 기억에 남는 스승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후배 선생님들의 소박한 멘토를 자임하면서 쓴 이 책을 여는 마당에서, 학생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 교사가 되기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거창한 사표(師表)가 되기보다는 레너드 스키너와 같은 인물로 기억되지만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기억되지 말자고 해서, 루소 식의 소극적 교육을 펼치자거나 학생에게 별 존재감이 없는 평범한 교사가 되자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교육적 소신을 저버리고 그저 아이들의 선호와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가 되자는 뜻도 아닙니다. 국회의원이 정치하듯이 교육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교사는 차라리 레너드 스키너 같은 교사만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좋은 스승으로 기억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신념에 충실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학생들과 충돌을 빚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학생과 부딪히기 싫어서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는 사람은 교육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소중히 품는 교육적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 학생을 꺾어 버리는 과정에서 이 글에서 말하는 불편한 기억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저런 원칙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교육신조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그런 불편은 제가 어릴 때 겪은 트라우마와는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릅니다. 예전에 비해 아이들이 교사로부터 상처받는 발화점이 낮아졌다고나 할까요. 의외로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사소한 문제를 크게 생각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의 작은 마음씀씀이로 쉽사리 상처의 봉합을 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교사의 세심한 배려라 하겠습니다. 학급이라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교사 시야의 사각지대에 있는 어린 영혼에 대한 작은 관심을 놓치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교사, 아니 학생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교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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