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교육 불가능 시대에 희망 품기

리틀윙 2014. 11. 17. 11:11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 합니다. ‘교실붕괴로 표상되는 우리 시대 학교교육의 민낯을 솔직히 드러내는 점에서, 일견 이 화두는 과격하다기보다 진솔한 성찰의 언어로 다가옵니다. 우리 시대의 학교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교육상품 찍어내기 바쁘고, 소수의 엘리트를 만들기 위해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들러리 서는 치열한 제로섬 경쟁의 각축장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교권은 바닥에 떨어져 학생이 교사에게 대드는가 하면 수업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이 엎드려 자는 것이 학교의 일상이 되어 버린 교육현실에서 우리 교사들이 교육그 자체에 대한 심각한 존재론적 회의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근 교육 불가능이란 화두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전현직 교사들의 입장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급진적인 입장은 그간의 찌든 학교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현재 전국적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혁신학교 운동에 대해서도 회의론을 제기하고 있어 비상한 반발심마저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이 시대에 교육이 불가능하면 과연 삶은 가능한가?” 되묻고 싶습니다. 날마다 우울한 뉴스로 도배가 되어 웬만큼 충격적인 사건사고로는 세간의 관심도 못 끄는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싶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 이 영혼 없는 사회에서 교육이 불가능하면 인간다운 삶은 과연 가능할까요?

 

 

 

 

교육 불가능 시대라 하지만, 어느 시대에서도 교육자가 의도하는 바대로의 교육은 불가능했습니다. 교육은 시대의 교육입니다. 교육은 언제나 시대의 지배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습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배계급의 정신이 지배적인 정신이 되는데 교육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을 뿐입니다. 유교사회의 교육은 봉건 지배질서의 유지가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함이라는 숭고한 뜻은 어디까지나 교육주체의 관념 속에만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육이념 홍익인간이 교육자들의 관념 속에 자리하듯 말입니다. 그 시대에도 당연히 교육 모순은 존재했고, 교육 병폐의 수준면에서 지금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덜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예로,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오늘날 입시제도보다 불합리한 것은 물론 그 교육적·사회적 병폐가 훨씬 심각했습니다. 때문에 그 시대에도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교육자가 있었다면 그 역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역설했을 것입니다.

교육은 시대의 정신을 반영할뿐더러 시대의 사회적 조건에 말미암습니다. 사회적 조건으로 정치, 문화, 경제 요인이 있지만, 이 중 결정적인 것은 경제적 조건입니다. 현재의 교육 불가능상황도 따지고 보면 결국 전 세계에 닥친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컨대 경제의 위기는 삶의 위기를 낳고 삶의 위기는 그대로 교육의 위기로 전이되는 것입니다. 가난 그 자체가 찌든 삶과 찌든 교육을 파생시키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에는 교육 불가능이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영혼을 상실하게 된 것은 경제발전이란 미명 아래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물질적 삶이 너무 급속히 발전해간 나머지 영혼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삶이 황폐화되고 교육이 망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경제가 잘 나갈 때는 교육도 별 문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잘 나가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하면서 교육도 위험 수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실붕괴IMF 이후 급격히 이루어진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경제위기가 곧바로 교육위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의 붕괴 이전에 가정의 붕괴가 있습니다. IMF 이후에 가정이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결손가정이 급증한 거죠. 일반 가정에서도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밤늦도록 직장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가정에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리가 없죠. 먹고 살기 바빠 자식 교육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가정에서는 아이를 방치하여 아이는 종일토록 인터넷 게임에 빠지거나 비슷한 형편의 아이들끼리 모여 각종 비교육적인 환경에 노출됩니다. 덜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 마치자마자 학원으로 보내집니다. 정부에서는 가정의 사교육비를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학교에서 방과후 교육프로그램을 돌리게 합니다. 저녁 시간이 다 돼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심신의 피로에 대한 보상으로 또 컴퓨터 게임에 열중합니다. 학교 공부 마치고 부모의 보살핌 속에 건강하게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부모의 방치 하에 음지에서 옆길로 빠지거나 가혹한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한국 아이들의 삶에선 구조적으로 건강한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살이를 건강하게 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요컨대, 원초적 삶의 공동체인 가정이 붕괴된 사회에서 교실붕괴는 필연인 것입니다.

교육의 모순을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에서 찾고 그 해법 또한 경제관계에서 찾으려는 것이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시각이죠. 이른바 경제결정론이라는 것입니다. 경제결정론도 문제지만 교육 문제를 사회적 모순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더욱 그릇된 시각입니다. 학교는 사회 속에 있고 교육 기제는 정치·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교육 모순의 해결은 사회적 모순의 해결이 선결되어야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교실붕괴를 막고 학교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이 복원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값싼 노동시장에 저당 잡힌 모성을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학교에서 돌봄교실 운영시간을 연장하여 아이들을 늦도록 붙잡아 두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 엄마가 가정으로 일찍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경제문제의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죠. 선의 본질은 공동선이고 정의는 다름 아닌 분배의 정의입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돌봄의 문제는 사회적 차원의 나눔의 문제가 고쳐지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회구조적 문제 탓으로 돌려 버리면 교육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교육의 문제를 교육제도의 문제로 돌려 버리면 교사의 존재 이유가 무의미해집니다. 교육-사회, 교사-교육제도의 대립쌍에서 전자를 강조하는 경향성이 보수이고 후자를 강조하는 경향성이 진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광장에서 제도개선의 요구를 열심히 외치면서 자기 교실에서 교육실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교사는 진보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객관적 조건이 아무리 척박할지언정, 교실에서 한 사람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성공적인 교육에서 교사의 의지와 열정은 결정적입니다. 언제나 변화는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작은 것이 바뀌지 않으면 큰 것도 안 바뀝니다. 작은 데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큰 곳에서도 변화가 일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참스승의 사표라 할 이오덕 선생의 이 말이 생각나는 한 권의 책을 이 대목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엄훈. 2012. 우리교육) 속에는 저자가 중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할 때 문맹인 학생을 밀착 지도하여 마침내 그들의 까막눈을 뜨게 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교육실천 경험이 보고서 형식으로 나열될 뿐 정서적 요소는 절제되어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줄 정도입니다. 하지만 같은 교사로서 저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어떤 감동과 함께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중학교 교사인 사람이 글 못 읽는 아이를 만나면 아이의 무능을 탓할 뿐 그것을 자기 짐으로 떠안으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자는 창우라는 아이현재를 과거 그리고 미래와 연결 지으면서 그 비참한 실존에 애달파 합니다. 또한 그는 인근의 초등학교에 파견을 나가 창우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초등1학년생 정환을 지도해 문자를 해득하게 합니다. 교사가 정환의 성공을 통해 창우를 떠올리는 대목에서 새벽에 찬물로 세수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정환이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금 창우를 떠올린다. 창우도 정환처럼 아무런 장애가 없는 아이였다. 창우도 정환처럼 문해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아이였다. 창우도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정환과 비슷한 읽기 발달을 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6년 후 창우는 초등학교 2학년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읽기 능력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만약 초등학교 1학년의 창우가 당시에 집중적인 교육적 지원을 받아서 2학년이나 3학년 무렵에는 보퉁 수준의 읽기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6년의 세월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같은 책, 136~137)

 

 

 

이 책 속에는 또 소규모학교인 관계로 업무 때문에 바빠서 글 모르는 아이들 지도할 시간이 없다 하면서도 늘 텃밭에서 채소가꾸기엔 열심인 초등교사들의 씁쓸한 일상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텃밭을 워낙 좋아하셔서 모두들 그런다는데, 운동회나 학예회 따위의 행사를 위해서는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정성을 쏟으면서 그늘진 곳에 있는 아이에겐 너무 무심한 태도에서 우리 초등교육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손님에게 자기 본연의 일을 맡겨놓고 텃밭가꾸기에 여념이 없는 관리자가 왜 실적이 빨리 안 나오냐채근하는 가운데 연말이 되어 그럭저럭 정환이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자신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해준 교사에게 고마움을 담은 카드를 건넵니다:선생님 힘내세요. 사랑해요. 정환올림

지하에 계신 이오덕 선생이 호통 치실 것 같습니다. 누가 교육불가능을 말하는가!

 

 

 

오늘날 학교가 붕괴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들 학창시절의 학교가 건강한 모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시절엔 교육하기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선생질하기 좋았을 뿐입니다. 텃밭 좋아하는 교장 만나면 텃밭에 모여들고 배구 좋아하는 교장 만나면 배구만 열심히 하면 만사형통하는 그런 학교였습니다. 또한, 지금 교권이 추락해 있지만 그 시절의 교권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교권이었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부지 뭐 하시노?’로 대변되는 그 시절의 학교풍속도는 교사에 의한 일방적 폭력과 길들임이 있었을 뿐 교사-학생 간의 대화적 관계는 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꼴통 같은 녀석 귀싸대기 한 대 날릴까 싶다가도 후환이 두려워 자제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학교가  더 바람직한 것 아닐까요?  시험점수 내려갔다고 매질 해대는 것은 교육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오늘날의 학교교육을 가리켜 교육 불가능의 시대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습니다.

영혼 없는 사회가 영적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면 그래도 믿을 것은 교육 밖에 없습니다. 나는 현재의 학교가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46월 지방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13인의 진보교육감을 선택했습니다. 세월호 정국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은 여야가 89로 대등한 결과가 나왔지만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가 압승을 거둔 것은 우리 국민들의 뜨거운 교육개혁 열망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진보 교육운동 진영에서도 각성과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으니 이것이 혁신학교운동입니다. 혁신학교는 참교육을 염원하는 교사들의 뜨거운 열정과 진보교육감 시대라는 우호적인 물적 조건에 힘입어 우리 사회의 낡은 교육을 혁신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불가능을 말하는 분들이 이 혁신학교 운동에 대해서조차 냉소를 보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하겠습니다.

 

인간다운 교육이 가능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인간다운 삶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인 사람이 머무를 곳은 학교 밖에 없습니다. 교사가 학생과 어떤 관계맺음을 지어 가느냐에 따라 교실에 웃음꽃이 만발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싸늘한 유형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육이 불가능한 시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명한 것은, 교사의 열정은 불가능하다 싶은 무엇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글 모르는 아이의 눈을 뜨게 하고 얼어붙은 아이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을 수 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교육혼의 고갱이는 사랑입니다. 베트 미들러는 아름다운 노래 <장미 The Rose>에서 말합니다. 사랑은 씨앗이라고요.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혼탁한 시대에 오늘 우리는 지금보다 덜 추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씨앗 하나를 심는 마음으로 교단에 설 일입니다.

 

 

 

밤이 너무 외롭고 갈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 사랑은 오직 운이 좋거나 강한 자의 몫이라 생각될 때, 기억할지라! 봄이면 해님의 사랑의 받아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 하나가 차디찬 눈 덮인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When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s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 Bette Midler, The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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