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케세라 세라

리틀윙 2014. 11. 23. 09:34

  Y초에서 5·6학년 영어전담을 맡고 있을 때(2009)의 일입니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옆 친구가 내 눈치를 보며 짝꿍을 막 깨우려 하길래, “그냥 놔둬라. 잠 오면 자야지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나의 배려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몇몇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혼난 기억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졸다가 맞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6교시까지 학교에서 수업 받게 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데, 그것도 부족해 절대다수의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수업까지 받습니다제 돈 들여 공부 배우러가서 졸았다고 두들겨 맞으니, 때리는 학원교육 관계자나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학부모들이나 모두들 참 이상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런 학원일수록 학부모들이 못 보내서 안달이라는 겁니다.

이렇듯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참으로 비정상적인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학생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곳에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지 뻔합니다. 여기서는 교육이 아닌 조련,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만남이 아닌 상거래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학습은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발견의 쾌감을 얻게 하는 방식보다는 오직 드릴로 일관할 것입니다.

교육기관이라 할 수도 없는 이런 곳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학생의 입장에선 두들겨 맞아가면서 억지로 배우는 공부가 즐거울 리가 없겠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정상적인 아이라면 당연히 지루함을 느끼고 한 눈을 판다거나 한두 번 학원숙제를 빼먹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는 이 이상한 교육시스템에서 낙오자가 되고 여기서 살아남는 아이와 학부모는 어떤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요컨대, 전자에겐 무능함의 낙인이, 후자에게는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는 첫 번째 좁은문을 통과했다는 보상심리가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에 따라 많이 때릴수록 학부모들이 더 선호하는광기의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1년에 4회씩 치르면서 헉헉 대고 또 시험 못 쳤다고 울상인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의 신세가 경주마와 같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말의 자발적인 의지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뜻도 영문도 모르고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가야 하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말의 본질은 야생마이거늘, 말은 들판을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태어났지 경주용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면서 말의 본성에 충실한 자발적 성장은 멈추어 버립니다. 트랙 안에서 달리기만 잘 하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퇴행이라 일컬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놀이시간을 빼앗긴 어린 아이는 야성이 거세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 마칠 무렵 교문 앞에서 아이들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노란색 봉고차를 보면서, ‘저게 닭장차와 뭐가 다른가?’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즐겁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학창시절에 공부를 억지로 많이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아는 30대 초반의 어떤 분은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서 현재 공무원이 되어 있는데, 공부에 대한 끔찍한 추억을 갖고 계십니다. 지금도 가끔 꿈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악몽을 꾼다 합니다. 얼마나 공부가 힘들었으면 그럴까요? 이 분과 달리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한 기억이 없습니다. 대학시절에도 나는 농땡이를 많이 피웠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책을 가까이 하며 열공을 해왔고 그 향학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요즘 현장에서 강조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인데, 솔직히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무엇은 기억에 남는 것이 잘 없습니다만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공부한 것은 우리의 지적 성장에 중요한 자양분으로 축적되어 있지 않습니까? 교사인 우리가 독서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무엇을 깨달아가면서 지적 희열을 느끼듯이, 우리 학생들도 그렇게 공부를 즐기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부하는 인간homo academicus’입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하신 공자님 말씀은 결코 창백한 이상주의를 설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할 일은 아이들의 이 생래적 지적 호기심을 식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공부를 억지로 많이 시켜서는 안 됩니다.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지 어떤 쓸모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움 그 자체를 즐기며 자기 페이스에 맞춰 꾸준히 해갈 때 공부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또 학업성적도 향상됩니다. 그 결과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자기비하를 할 필요 없습니다. 배움을 통해 얻은 지적 성장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 우리 행복에 소중한 밑거름이 으로 자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사이기 전에 나도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입니다. 이 사회의 학부모라면 누구나 아이 공부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그 결과에 욕심을 낼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을 경주마로 키우진 말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학부모들이 교육에 관한 한, 제 정신이 아닌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했으면 합니다. 그럴 때 결론은 자명해집니다. 학부모가 돼서 같이 미쳐갈 수는 없습니다. 그 광기의 생존경쟁 대열에 미친 척하고 뛰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내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설령, 그 달콤한 열매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의미할까요?

 

 

케세라 세라!

1950년대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유명한 노래 제목 ‘Que sera, sera(What will be, will be)’, 자녀교육에 관해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Que sera, sera’될 대로 되겠지'의 뜻이지만주), '자유방임형 정책'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케세라 세라는 학교교육이라는 국지적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대안으로서 삶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생존경쟁의 패러다임에 비해 케세라 세라 패러다임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 세상일은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되거나 반대로 될 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되 물 흘러가듯 삶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는 가벼운 왈츠풍의 노래지만 발랄한 노랫말의 이면에 이렇듯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아는 한 중등 윤리교사가 생각납니다. 그 선생님은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생각이 짧았던 내가 그 영문을 궁금해 하자, 미래의 행복을 위한답시고 입시지옥에 현재를 저당 잡힌 아이들의 삶이 너무 측은해서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까진 흘려본 적이 없는 초등교사인 내가 그때 참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 is what she say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 물었지

미인이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무엇이 되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보면 학창시절에 쟤가 인간 되겠나싶었던 아이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또한 공부를 못해서 예상대로(?) 자동차 정비 따위의 일을 하는 친구의 경우도 밝은 얼굴에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기도 합니다. 반면, 무슨 법대나 의대를 나와 변호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는 친구들의 경우는 비싼 차를 몰고 다님에도 늘 돈 걱정 하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 자랑 아니면 돈 걱정이 전부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뿐더러 자산순도 아닌가 봅니다.

지금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미래에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든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겁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답시고 아이의 현재를 입시지옥에 저당잡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행복한 아이가 미래에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말하듯, 현재를 즐기게 합시다. 카르페 디엠 Carpe diem!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 웹사이트에서 우리 말로 케세라 세라의 뜻을 검색하면 될 대로 되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약간 그릇된 정보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어에서는 케세라 세라’가 라틴계열의 언어(스페인어, 이태리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언어사적으로 이 말은 16세기 이후부터 귀족 집안의 가훈이나 묘비명에서 어떤 계시적(heraldic) 의미로 드물게 사용된 흔적이 발견될 뿐, 문법적으로도 오류가 있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도리스 데이의 노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의 작사자가 영어로 ‘What will be will be’로 옮김으로써 현재 우리가 아는 케세라 세라가 되었습니다. 이 문맥에서 ‘what’은 의문사가 아닌 관계대명사로 쓰여 무엇이든 될 것이 될 거야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될 대로 되겠지라면 몰라도 될 대로 되라는 것은 오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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