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보수는 싸가지가 없어도 대중을 지배한다?

리틀윙 2014. 9. 6. 21:39

강준만의 책 <싸가지 없는 진보>를 계기로 진보 진영에서 ‘싸가지’가 화두로 뜨고 있다. 이에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논객 진중권은 “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싸가지가 있어도 그 좋은 싸가지로 대중에게 할 말이 없는 게 문제”라는 발언으로 일축했다.
나는 두 사람의 말 가운데 어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중권의 말은 “싸가지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싸가지보다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담론을 주조할 철학과 지성이 빈곤한 것이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런 뜻이라면, 강준만도 아마 동의할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진보가 망해가는 것은 싸가지가 없는데다 철학까지도 빈곤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진보연 하는 자들 가운데 이런 경우 적잖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대부분 자기 영역에서 완장을 차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페이스북에 써오고 있는 전교조에 관한 비판글은 실로 이 한마디 – 싸가지도 철학도 빈곤한 진보! - 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적인 교사'를 자임하는 사람이 지적 단련을 게을리 하면서 싸가지도 없는 경우를 나는 경멸해 마지않는다.이러 부류들에게 강준만의 글이 불편할 것은 당연할진대, 그들의 이런 심사에 위로가 될 성싶은 "수상한" 글 하나를 접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된다.

 


'싸가지'와 거리 먼 박정희…그 딸이 대통령 된 비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0031

 

글쓴이의 논리는, “진보가 싸가지 없어서 망한다면 과연 보수는 싸가지가 있어서 흥해오고 있는가”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박정희와 일베를 들고 있다.

우선, 싸가지 없는 일베가 과연 보수(혹은 수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생각해보자. 일베가 보수를 이롭게 하는 것은 “싸가지 없음”이 아니라 보수적인 청년대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담론 형성과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퍼뜨리는 왕성한 댓글작업이 아닐까? 광주민주화 항쟁의 피해자들을 ‘홍어 택배’에 비유하는 이들의 패륜적 행각은 보수 진보를 떠나 국민적 공분을 싸기 충분한데 이들의 그런 행동을 달가워할 보수정치인이 있을까?

이어서 글쓴이는 ‘박정희와 5.16쿠데타 세력’의 싸가지에 대해 거론한다. 5.16 당시 박정희는 44세이고 그 심복들의 나이는 고작 30대 초중반이었는데, 이 싸가지들이 연로한 윤보선-장면을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했다.(A)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선 대단히 '싸가지 없게' 보였을 것이다.(B) 그럼에도 박정희는 권력을 유지해갔고 나아가 그 딸은 직선제로 대통령이 되었다.(C)

1961년의 박정희와 현재 박근혜까지의 50여년 한국현대사에서 있어온 복잡다기한 정치 역학관계를 이 단순한 삼단논법의 싸가지론으로 환원해버리는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할 뿐이다.
이런 유치한 삼단논법을 통해 이 분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 한국 민중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은 싸가지 없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란 말인가?
- 박정희가 싸가지 없이도 대중을 지배할 수 있었으니 진보도 싸가지 없이 얼마든지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대한 최소한의 식견을 가졌더라면 이런 황당한 삼단논법은 구사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싸가지 없는 박정희가 권력을 유지해 갔던 것은 싸가지 없는 연산군이 왕위를 유지해 갈 수 있었던 것과도 같다. 물론 연산군은 쫓겨났다. 정적에 의한 쿠데타(중종반정)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도 암살당했지만 조직적인 반란이 아니라 평소 사적인 원한을 품은 한 두 사람의 우발적인 시해로 말미암았다. 역설적으로 이때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연산군과 유사한 말로를 맞이했을 것이고 오늘의 박근혜도 있지 않다. 특히 한국인에게 ‘죽음’은 생전의 많은 치부를 묻어 버린다.

총칼로 권력을 찬탈할 때는 비록 박정희가 대중에게 싸가지 없이 비쳤겠지만 그 싸가지는 그람시의 용어로 ‘강압(coersion)’이라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상쇄된다. 군사쿠데타의 명분과 군사독재의 정당성은 북한과 대치한 상황에서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공고히 하는데, 이에 대한 모든 반발은 폭력으로 짓밟아 버린다. 박정희시대엔 말이 많으면 빨갱이였다!
대중에게 ‘강압’은 처음에는 불만을 야기하다가도 세월이 가면서 점점 자연스러운 것이 돼 버린다. 에릭 프롬의 설명을 빌리면, 파쇼적 지배에 순응하면서 대중은 마조키스트가 돼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압은 ‘빵’과 결합될 때 결정적으로 위력을 더해간다. 결국 박정희의 싸가지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형 리더십’으로 둔갑해 갔다. 그 후광으로 그 딸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의 시대와 달리 딸의 시대는 오래 전에 ‘시민사회’에 진입해 있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와 거리가 멀었던 점에서 연산군의 조선시대와 유사하다. 둘 다 싸가지 없는 공포정치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는 총칼에 의한 ‘강압’이 통하지 않으니 그람시의 용어로 ‘동의(consent)’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민중에게 박정희는 더 이상 싸가지 없는 인물이 아니라 북한 인민에게 김일성과도 같은 ‘국부’가 되었다. 이건 강압이 아닌 동의의 산물인 것이다.


박정희가 싸가지 없이도 대중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글쓴이의 논리는 상식적으로나 진보적 시각(헤게모니론)으로도 말도 안 되는 난센스일 뿐이다. 그리고 논리적 정합성을 떠나 대관절 글쓴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진보는 싸가지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은커녕 구청장 하나 못 만들어 내는 진보, 동네 개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진보가 싸가지마저 없으면 뭘 어쩌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