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4.3 제주항쟁에 관한 인식

리틀윙 2013. 4. 4. 14:59

 

 

 

 

어제가 4.3 제주항쟁일이었다. 반 전체 학생수가 일곱 밖에 안 되는 우리 반에 마침 어제 생일 맞은 아이가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43일을 그저 ○○이의 생일로만 기억한다. 교사가 되어 이 땅의 현대사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초등학생에게 4.3을 말하기가 여러모로 불편하기만 하다요컨대, 4.3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팩트를 교단에서 자유롭게 논하지 못하는 현실 자체가 가공할 폭력에 의한 억압의 역사가 진행 중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떤 글을 접하면서 약간의 문제의식을 품게 된다. 4.3에 대한 온당한 역사적 시각을 갖기 위해 나는 고강도전략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상대방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개인의 경우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대한 조직이나 국가의 역사적 사건이 되면... 수많은 이의 생명을 빼앗고, 민심의 이반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

 

페북 공간에서 꽤 영향력을 행사하는 논객이 쓴 글의 일부분인데, 적잖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진보를 자임하는 분들 가운데도 4.3에 대해 이 같은 시각을 갖는 경향성이 많은 듯하다. 이를테면 4.3을 남로당의 모험주의적 노선으로 빚어진 참사로 보는 관점이다. 미리 일러두지만, 이 글을 쓰는 필자 또한 현실 좌파운동에 대해 호감을 품는 편은 아닌 사람이다.

4.3국가기관에 의한 폭력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간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4.3을 좌익에 의한 폭동사건으로 배워온 것을 생각할 때, 이 두 시각 가운데 전자를 진보’, 후자를 보수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후자의 시각이 더 정확하고 온당할 지도 모른다. 4.3이 좌익분파의 오판으로 빚어진 참극이라는 관점에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이 사건은 35년이라는 일제강점기를 우리 역량으로 종지부 찍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얼떨결에 맞은 미완의 해방에 따른 필연적인 비극이다. ‘8.15 광복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압제의 시작이라는 점은 별 급진적 역사관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상식이다. 4.3이 일어난 19484월은 미군정기였다. 쉽게 말해, 조선의 점령국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 해 8.15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자주권을 누리게 되었지만 향후에도 미국은 적어도 군사작전권에서는 계속 주인행세를 해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4.3국가에 의한 양민학살로 규정할 때, ‘국가라는 말이 한국정부를 뜻할 것은 당연하다. 토벌에 나선 군인도 한국군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1948.4.3)는 한국정부가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시기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한국정부가 한국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3의 가공할 폭력의 주체는 엄연히 미군정인 만큼, 이 사건은 미국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이 저지른 만행으로 봐야 한다.

 

 

20세기의 세계사는 미국의 패권주의로 점철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이 일어난 시기는 20세기 역사에서 미국의 패권주의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팽창하기 위해 중대한 기로였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소련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추축국을 분쇄시켰다. 사실, 당시 일본은 거의 패망 일보 직전에 있었다.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리는 무리수를 감행한 것은 순전히 과시용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2차세계대전이 끝나감은 소련과의 동반관계를 청산할 시점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시기 소련은 놀랍게도 독일과의 지난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사대국으로 성장하던 중이었다. 때마침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였는데, 이 신무기가 과연 얼마나 위력적인가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차에 소련을 향해 '너도 까불면 이렇게 혼난다'는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연합국의 승리가 미국의 활약에 힘입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실험정신을 발휘하고자 했다. 이 전쟁미치광이들이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폭탄 두 방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실상 일본의 패망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이 원자폭탄을 터뜨리지만 않았어도 미국이 한반도를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남북분단도 없을 것이며,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미국은 히로시마 이후에 한반도의 남쪽을 차지하는 카이로회담을 성사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미국에게 굉장히 중요한 땅이었다. 특히 미군정기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미국 사이의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된 시기여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의 남쪽 땅에서 좌익의 준동을 거세게 짓밟아만 하는 입장이었으니 이것이 고강도 전략(high intensity strategy)’이다. 때는 전국적으로 광복의 기쁨 속에 일제강점기에 친일행각으로 동포들을 괴롭혀온 친일파들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이 같은 민중의 정서는 대체로 좌익의 입장과 일치했고 반대로 친일파들이 은신할 유일한 도피처는 우익 편에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통치자인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의로운 좌익보다는 부도덕한 우익을 옹호했으니 이 부도덕한 무리들에게 미군은 구세주와도 같았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 땅에서 친일세력들이 득세하고 있는 단초가 되었다.

현대 세계사에서 미국이 고강도전략을 감행하며 약소민족을 잔인하게 짓밟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최근의 사례로 이라크전쟁도 그 한 예로 볼 수 있지만 가장 전형적인 것은 남미에서 미국이 꼭두각시 정권들을 조종하여 테러리즘을 자행한 경우라 하겠다. 과테말라, 파나마, 멕시코, 페루,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등에서 벌어졌던 잔인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국의 고강도전략과 직간접적으로 관계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블로그에 쓴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blog.daum.net/liveas1/6498704) 4.3 제주는 바로 이 같은 고강도전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서 남미의 학살사건과 제주의 학살은 서로 닮은꼴이라 하겠다. 특히 제주의 경우는 미군정기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미국의 책임은 직접적이라 해야 한다. 미국의 고강도전략이 남한에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1980년 광주에서였다. 1985년 서울에서 일단의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여 미국은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져라고 외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피를 끝으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전략을 고강도에서 저강도로 수정해간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알고 보면 그 우연이 필연과 연관을 맺고 있다. 모든 우연성은 필연성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 광주의 예를 살펴보자. 박정희 사후 12.12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국민의 불만을 설득시킬 만한 아무런 정통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부마사태를 계기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학생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전두환 일당의 입장에서는 총칼로 뺏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일전을 벌이는 고강도전략이 불가피했다. 누구든 적절한 대상을 시범 케이스로 삼아 희생자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때 그 타겟으로 가장 유력했던 것이 서울의 학생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서울지역 학생운동을 이끌던 서울대 학생회장은 이 글 첫머리에 나오는 인용문의 내용과 똑같은 논리 즉, 아군의 힘이 약하고 상대가 강하니 해산하자는 결론을 내리니 이것이 유명한 서울역회군(1980.5.15.)이다. 이 사람은 그 후 청산주의적 길을 걷다가 마침내 한나라당의 품에 안겨 지금까지 국회의원을 해먹고 있다. 최근엔 국회 회의 도중 누드사진을 검색하다가 딱 걸려서 망신살이 뻗친 바로 그 의원 심재철이다. 심재철의 '현명한' 판단으로 서울로 향하던 공수부대가 광주로 발길을 돌렸고 그 뒤 광주에서 벌어진 참극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오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광주는 심재철 의원의 고향이란다.

 

 

방금 살펴봤듯이, 80년 서울의 봄 정국에서 전두환 일당이 벌인 피의 잔치, 즉 살인마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지로 광주가 선택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한 땅의 어느 곳에서든 학살이 일어날 것은 "필연"이었다. 1948년의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대구 항쟁이나 4.3이 일어난 6개월 뒤 여수/순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좌익에 의한 저항은 고강도전략의 이름으로 잔인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한국의 필연적 정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이라 하면, 4.3 제주를 두 번 죽이는 망언이 아닐까 싶다. 4.3의 희생자 가운데 1/3은 힘없는 노인과 아이 그리고 부녀자들이었다. 당시 미군정과 그 꼭두각시 한국군부는 세계 게릴라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잔인한 방법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의 책임이 저항을 기도한 세력에 있단 말인가?

35년의 지긋지긋한 일제강점기 뒤 해방이 왔지만 일본 순사보다 더 악독했던 친일모리배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또 다시 민중을 유린하는 언어도단의 현실에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면" 입 다물고 얌전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현명한 노선'이 아니라 그저 노예 근성에 다름 아니다. 격동의 한국사에서 이런저런 저항이 없었으면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떤 수준에 처해 있을까? 4.3항쟁과 여순 항쟁이 없었으면 80년 광주의 저항도 어렵지 않았을까? 그리고 광주의 희생이 없었으면 문민정부-참여정부의 시대가 이 만큼 빨리 올 수 있었을까?

 

한반도 이남에서 자행된 일련의 백색테러는 한국 민중에게 극심하게 편향된 이데올로기 인식체계를 남겼으니 반지성적인 반공주의이다. 한국사회의 기성세대의 뇌리에 자리 잡은 반공주의는 이성적인 정신교육의 결과라기보다는 조건반사라는 단세포적인 기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땅에서 좌파에 우호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중들은 반사적으로 에 대한 거부감을 갖도록 조건화된 것이다. 이 땅에서 언제쯤 이 비이성적인 레드컴플렉스가 극복될지 모르지만, 그 출발은 4.3제주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