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사유는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

리틀윙 2013. 7. 1. 00:02

침묵이 때로는 거짓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중립적인 태도로서, 침묵은 금이다라는 금언에서처럼 진중한 자세로 높이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갈등사태에서 침묵은 결코 중립적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일정한 편당(=당파성)을 지향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를 목격했을 때 침묵을 지키는 것은 범죄를 돕는 격이 됩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 외에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고부간의 갈등이나 직장 내의 사회적 약자와 상사 사이의 갈등과 같은 수많은 갈등사태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분쟁당사자가 아닌 제3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편 아니면 저 편을 들게 되어 있지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사회적 약자의 피눈물을 외면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의에 편승하는 처세술이나 화냥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사유는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의 실질적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전범으로 수배를 받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공개재판을 받은 뒤 처형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자신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논리로 재판부에 선처를 요청했습니다. 미국 <뉴요커>의 기자로서 이 재판을 지켜보고 아이히만을 관찰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전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악독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악마의 화신이 되어 홀로코스트를 주도했을까요? 아렌트의 말을 들어봅시다.

 

He merely, to put the matter colloquially, never realized what he was doing. It was sheer thoughtlessnessby no means identical with stupiditythat predisposed him to become one of the greatest criminals of that period.... Such thoughtlessness can wreak more havoc than all the evil instincts taken together... that was, in fact, the lesson one could learn in Jerusalem.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제로서,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 시기에 그를 가장 악독한 범죄자로 몰아넣었던 것은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이는 어리석음과는 다르다 였다. 그러한 무사유는 어떠한 악한 본능을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 사실상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갈등사태에서 침묵이 중립을 뜻하지 않듯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태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회피한 채 아무 생각없이 상부의 지시대로만 처신하는 것 또한 위선이나 악 그리고 범죄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심각성은 그가 중요한 지위에 있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때문에 중요한 직책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동인형처럼 상부의 지시대로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사유는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인데, 이 쿨한 개념을 통해 아렌트는 악은 특별히 악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 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몫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화두를 던집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처음에 아렌트의 이와 같은 발언에 노발대발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주역 아이히만은 악마 그 자체인데 왜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하는가 하는 것이죠. 그러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결코 평범한 비평이 아니라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표현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통혁당 사건으로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 자신을 취조하던 형사가 부인과 전화 통화하면서 자기 애가 감기 걸려서 걱정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연실색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악랄한 고문기술자도 자기 집에서는 성실한 가장 노릇하는 평범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근안도 그렇고 전두환도 그렇겠죠.

 

사실 악한 사람은 잘 없습니다. 인간은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으면 대부분 선합니다. "사람 좋다"는 말처럼 무의미한 말도 없는 법이죠. 아렌트는 아이히만도 특별히 부지런한 것을 제외하곤 어떠한 악한 동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철저한 무사유와 부지런함이 결합되면 아이히만 같은 인물이 배출됩니다. 사실, 교직사회에 이런 사람 많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존재론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오로지 승진만을 위해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 ‘철저한 무사유의 소유자'들입니다.

 

제 초임 때 5월의 어느 토요일이었습니다. 수업 마치고 주말이라는 기쁜 마음에 덜 떠 집으로 가려는데, 교감선생님께서 나를 포함해 두 총각선생을 잡으시고 느닷없이 숙직실에서 맥주 마시며 고스돕을 치자고 하십니다. 대낮에 무슨 술이냐며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한다고 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오늘 제발 나랑 같이 있자고 하십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은 전교조 창립일(1989.5.28.)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사유는 둘째 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런 짓거리 할 수 없는 겁니다. 선배교육자라는 사람이 새파란 후배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요?

서글픈 것은 식민지 한국 교육을 지배해온 자들은 죄다 이런 자동인형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육은 무엇보다 철학과 신념의 문제이건만, 이런 철저한 무사유가 미덕으로 통하는 이런 시스템 속에서 창의인성 교육을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무사유는 당사자로 봐서는 매우 편리하고 유익한 자질이지만 사회로 봐서는 재앙입니다. 그 자가 평교사이면 자기 학급 애들만 망치지만 교감/교장이면 온 학교를 망칩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 내 주위에는 사유하는인물 가운데 장학사나 교감이 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그 세계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사유하면 불편해지는 곳이 한국사회의 제도권입니다. 그런 제도권이 히틀러 치하의 아우슈비츠와 뭐가 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