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소외의 자본주의사회, 왜 사람들은 반려동물에 집착하는가?

리틀윙 2012. 5. 28. 17:05

 

 

 

   귀여운 강아지 말티즈와 함께 한지 2년이 넘었다. 나는 그래도 이 강아지에 죽고 사는 입장은 아직 아니다. 한 번씩 발로 차곤 한다. 너무 심하게 짖고 할 때 이웃에 폐 안 끼치기 위해 단속을 해야 하는데 녀석이 낮은 곳에 있으니 손보다는 발이 가까워서 그런다. 그러나 평상시에 이 개가 사랑스럽기는 하다. 나보다 우리 집 아이와 아내에게 이 동물은 정말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우리 집과 때를 같이 해서 최근 우리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는 집이 상당히 늘어난 것 같다.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개소리가 들려오니 말하자면 '개판'이 되어 가는 형국이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개를 비롯한 애완동물 분양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엄청난 양적 발전이 질적 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보신탕 문화의 종주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종래의 애완견이란 말 대신에 반려견이란 말로 대체되고 있을 정도이다.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펫 신드롬은 우리 사회에 소외가 만연해 있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반려동물을 선호하거나 집착하는 대중의 기호가 아니라 그러한 신드롬의 원인인 인간소외를 파생시킨 자본주의사회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라는 것을 분명히 짚고 싶다. 나의 논리는 소외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펼쳐갈 것이나 그에 앞서 개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낫게 한 원인으로서 언어를 분석할 필요를 느낀다.

 

무릇 우리의 관점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용어법(terminology)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릇된 용어는 필연적으로 그릇된 인식을 낳는다. 개와 관련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일컬을 때 개새끼(son of bitch)’라는 말을 쓰는데, 개에게 투영된 이러한 개같은 관념이 부당한 것이라는 것은 개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안다. 개만큼 인간적인고등동물은 없다. 요컨대, 우리에게 라는 시니피앙(기표)은 뭔가 부정적인 무엇을 표상하는 시니피에(기의)를 갖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 형성된 관념체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러두는 바이다.

 

 

 

 

개만큼 인간적인 동물 없다는 전제 하에서 소외를 논하려면, ‘소외라는 개념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철학사전에서 소외를 찾아보면 헤겔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실존주의적 개념에 다다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개념으로 마르크스의 소외(alienation)와 실존주의의 소외(estrangement, 마르크스와 헤겔의 소외도 영어로 이렇게 표기하기도 함)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개념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상적인 의미로 우리가 흔히 구사하는 소외의 개념은 후자인데, 후자는 전자의 결과이지 그 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인 의미로 쓰이는 후자의 소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학(Marxist sociology)적 의미의 소외를 이해해야만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소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 내재된 경제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소외개념은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생겨났는데, 이 끔찍한 전쟁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에서 기인한 필연적인 갈등의 폭발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소외인간, 집단, 제도 혹은 사회가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나 산물에 대해서 소원하게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관념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포이어바흐)이나, 인간이 만든 돈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마르크스)을 말한다. 소외는 항상 자기소외, 즉 자신의 행위를 통한 자신으로부터의 자기소외이다. 때문에 소외의 기제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욱 그것과 멀어진다. 노동자는 상품을 많이 만들어 낼수록 (자본가는 부유해지는 반면) 자신은 가난해진다. 공부의 목적은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함이건만, 경쟁교육 시스템 속에서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인간성이 더욱 황폐해지는 이 슬픈 역설도 소외로 설명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화된 극단적 형태의 소외로 마르크스는 물신(fetishism), 루카치는 물화(reification)’의 개념을 논하였다.

 

 

물화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인간적 방식이 아닌 물질적 이해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물화되어 이루어진다. 동방예의지국이라 하는 이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는 물질적 능력을 지닌 한도에서만 자식에게 대접을 받는다. 자본주의의 물화 기제에 덜 오염된 부모는 순진하게 자신의 남은 재산을 자식에게 넘겨주는데 그 순간부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반려의 삶을 선택한 이들 가운데 독거노인이 많은데, 이들 외로운 황혼의 인생들에게 자식들이란 개만도 못한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갖춘 생명체로서 물화되지 않은 존재는 어린 아이와 개 밖에 없다. 어린 아이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물화되어 언젠가는 상처를 줄 것이지만, 개는 절대로 기르는 사람에게 배신 땡기는 일이 없다. 최근 중국에서 홀로 사는 한 노파가 죽자 그 애완견이 노파의 시신 옆에서 16일간 식음을 전폐하다가 주인을 따라 죽었다는 뉴스가 생각난다. 개만큼 인간적인 동물이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처음 마음과 달리 개에게 점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자본주의내의 물화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받은 트라우마(이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소외감이다)를 개와의 관계를 통해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개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개로부터 받는 크고작은 감동이라는 자극(stimuli)은 점진적으로 강화되어(reinforce) 마침내 개는 가족만큼(가족보다) 소중한 반려자로 자리하는 것이다. 정력 떨어졌다는 착각이 들 때 개고기 생각하며 군침 흘리는 부류들은 개와 인간 간에 이루어지는 이런 끈끈한 유대관계를 절대로 이해 못할 것이다.

 

 

 

영화 <하치 이야기>의 한 장면: 하치는 오후 5시가 되면 어김 없이 기차역에 나가 파커 교수(리차드 기어 분)를 기다린다. 

 

주인이 죽고 난 뒤에도 하치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기차역에서 주인을 기다리면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하치 이야기>는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미국판으로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본의 시부야역에 하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

 

그러나 이 모든 궤변(?)에도 불구하고 필자 역시도 개는 어쩔 수없이 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집회에 개가 10만 마리 모인들 그건 개판일 뿐, 사회를 바꾸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어제보다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 오직 인간밖에 없다. 설령 개보다 못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를 변화시켜 그에게서 희망을 찾아야지 개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는 자본주의사회에 살면서 사람은 어떤 기제를 통해 피난처를 찾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의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취미 활동에 몰두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가장 보편적이고 해악한 도피수단으로 사람들은 술담배에 의존하는데, 한국인의 술 소비량은 OECD 국가 가운데 부동의 1위이다. 한국이 OECD 국가 가운데 단연 1위를 차지하는 또 하나가 근로시간이다. 한국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621시간으로서 독일(1,353시간)2배에 달한다. 반면 1인당 평균 임금수준은 OECD 국가 평균의 64%에 불과하다. 일은 죽도록 하는데 돈은 적게 버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다. 술 소비량이 1위인 것과 근로시간 1위 그리고 낮은 수준의 임금,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평일엔 죽도록 일 하고 주말엔 미친 듯이 퍼마시고 피워대고 술 취해서 2차 노래방 3차 나이트클럽으로 이어지면서 고래고래 악 쓰고 흔들어 대다가 탈진 상태에 이르는 이 자학적인 일상이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인 것이다. 그 결과로 재벌은 자산을 증식해가지만, 근로대중의 멘탈은 붕괴되고 삶은 피폐해간다.

 

 

 

 

사람들이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을 두고 소외니 어쩌니 하면서 문제의식을 갖는 분들이 술담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한국인의 찌든 삶의 형태에는 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가? 반려동물에 애착을 갖는 것이 진보적 마인드에 부합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술담배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개고기 문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 자체를 경멸할 생각은 없다. 모든 문화는 당대 사람들이 고안해낸 최선의 선택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보릿고개로 상징되듯이 식량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고육지책으로 품게 된 습속이 개고기 음식문화일 것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당연히 식인풍습도 이해해야 한다. 사실, 서구 사람들의 입장에선 뉴기니아의 원주민들의 식인풍습이나 현대 한국인들의 보신탕문화를 대등한 수준의 야만적 행위로 이해할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옛날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개 이외의 다른 대안 음식이 널려 있다. 옛날 조상들은 소 먹을 여유가 없어 개 잡아 먹었지만, 지금은 개고기 값이 소고기 값보다 더 비싸다. 나는 진보를 외치는 사람이 보신탕 먹으러 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솔직히, 종교지도자가 호텔에서 억대 도박판을 벌이거나 룸살롱을 전전하는가 하면 몇 백억대의 금융비리에 연루되어 있고, 진보정당 간판 내건 곳에서 추악한 양아치 짓거리들이 자행되는 이 개판 5분전의한국사회에서 개보다 나은 인간 얼마나 되는가? 정력 떨어졌다고 개 잡아 먹을 생각하지 말고, 담배 끊고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자. 그리고 기력 부족으로 인간답게 못 사는 경우는 없다. 위장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채우려 애쓰지 말고 머릿속에 값진 지식을 채우고 가슴으로 감동적인 무엇을 품으려 애쓰는 것이 인간다운 삶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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