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예의'에 관하여

리틀윙 2011. 10. 13. 13:58

- 2009년 3월에 쓴 글 -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나니, 인간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다운 삶’이란 고상한 문화를 즐기거나 철학적인 삶을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신약성경에서 지고의 규율(황금율)로 통하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자”가 이 글의 모토이며, 이는 간단히 ‘예의’라는 낱말로 요약된다.


동방예의지국?

조선말기에 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한국인의 삶은 ‘예의’와 너무나 거리가 먼 천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아직도 어린 학생들 앞에서 ‘동방예의지국’ 운운하며 빗나간 쇼비니즘을 설파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 아니면 저능아일 것이지 ‘지성인으로서의 교사(Teacher As Intellectual)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한국인들 가운데, 죽은 사람(조상님) 말고 산 사람에게도 예의 바른 생활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그 퍼센티지는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들보다 절대적으로 낮을 것이다. 자동차 문화 하나를 봐도 그렇다. 도로에서 예의바른 운전자를 만나기 어려운 나라가 한국이다. 아마 세계 최악일 것이다. 또한, 도무지 책 읽을 줄 모르면서 틈만 나면 자동차 광내고 또 무슨 튜닝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바퀴를 바꾸고 하는데, 누가 자기 자동차에 접촉하기라도 하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말하자면, 자동차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예의바르면서 사람에게는 예의를 모르는 것이다. 늙은 부모에겐 무심하면서 산에 가서 조상은 잘 모시는 인간이나 이런 사람들...... 마르크스가 말한 “죽은 것이 산 것을 지배하는”, 이 기형적인 소외의 문화가 극도로 만연해 있는 곳이 바로 이 천민자본주의 한국땅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사로서 나는 학교에서 '예의'를 가르치는 교사에 의해 자행되는 '무례'의 사례를 숱하게 목격한다. 우리네 학교에서 교장에게 예의바른 선생은 많아도 아이들에게 예의바른 선생 잘 없다. 아이들보고 인사 잘 하라고 잔소리 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건네는 인사에 따뜻하게 반응하는 선생 보기 드물다. 성인인 선생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약하디 약한 초딩들을 얼마나 부려먹는지, [워낭소리]의 소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 정말 질리도록 부려먹는다. 교실, 특별실, 교장실, 교무실, 운동장, 화장실 청소는 기본이고, 학교에서 어떠한 많은 양의 물체를 옮길 때도 그 몫은 아이들이다. 2월에 학교로 교과서가 배달되어 올 때 빈 교실 가득 쌓인 박스떼기를 보라. 그 무거운 짐덩이들을 다 누가 옮기는가? 초딩 아이들이다. 담임선생과 아이들이 같이 끙끙대면 이런 말 안 한다.

교육의 이름으로 빚어지는 아동학대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나마 옛날 아이들은 이 따위 인격 수모만 버티면 되지만, 요즘 초딩들은 학교 마치고 저녁시간까지 학원에 붙잡혀 지겨운 학습노동에 시달린다. 학원숙제 안 해왔다고 두들겨 맞아가면서 시달린다.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소말리아의 성인들이 아이들을 이렇게 혹사시킬까? 이게 “예의바른” 사회의 모습인가?


예의란 무엇인가?

‘예의’라는 주제로 마인드맵을 그려보자. 여러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나는 ‘배려’라는 한 낱말이 예의의 정수를 말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황금율’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예의는 인간대 인간으로서 수평적인 만남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예의는 ‘내리빠따’가 아니다. 설령 경로효친(敬老孝親)에 입각해 연장자나 어버이에 대한 어떤 예절을 요구하더라도 그 공경심은 아랫사람이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지 교과서를 통해 주입하거나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강제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예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의 소통을 통해 학습되고 또 바람직한 문화로서 정착되어 간다. ‘내리빠따’가 아닌 ‘내리사랑’이 있을 때 경로효친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미친 사회에서는 ‘예의’가 억압이나 심지어 착취와 혼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예의의 근간인 ‘배려의 마인드’가 너무 빈곤하며,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실종 상태에 있다.

논리적으로 억압과 배려는 서로 상극적인 관계에 있다. 억압이 있는 곳에 배려는 없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치로, 억압자를 배려(?)하는 곳에서 사회적 약자는 항상 억압과 착취를 강요받게 되어 있다. 학교에서 교장에게 특별한 배려심을 선생 치고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자는 학생을 억압 또는 착취하여 권력자에게 “예의바르게” 처신한다.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하느냐고? 학교가 그렇게 추한 곳이냐고?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를 확신한다.

- 제대로 된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이 보기엔 ‘아동학대’로 규정되거나 형사상의 범죄로 간주될 숱한 비리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 한국의 학교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학여행 갔다와서 뭘 들고 교장실을 찾는 것은 명백한 범죄이며 그 비리는 모두 학생에 대한 착취의 결과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학교에서 노역 작업에 아이들을 부리는 것은 아동학대내지 아동노동력 착취로 볼 수도 있다. 물론, 학교예산이 빈곤하고 수시로 사안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용역업체에서 인부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은 안다. 나는 다만, 최소한 우리가 아이들 부려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는 뜻이다. 그리고 그걸 무슨 ‘봉사활동’이니 떠들면서 수업시간에 시키는 부류들은 ‘교육학’이니 ‘전문직’이니 하는 전문어를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웃기는 것은 이런 무식한 인간들이 '전문직'이라는 교육신분 사다리를 잘 타는 점이다.


학교가 다른 사회에 비해 깨끗한 곳이라는 의견에 일부분 동의한다. 비리의 규모 면에서는 아마 가장 깨끗한 곳일 터이다. 그러나 그 비리로 인한 피해자가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는 점, 그리고 그 추한 생리를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교육적 영향을 받는 점에서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그간 전교조는 학교관리자나 교육관료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과 견제의 기능을 잘 수행해 왔으나 교사집단에 의해 벌어지는 온갖 반교육적 작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을 감아왔음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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