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프레이리

쉽게 읽는 페다고지) 프레이리의 삶

리틀윙 2011. 7. 13. 23:04

프레이리의 삶

 

<페다고지>의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파울루 프레이리의 삶과 브라질 현대사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릇 어떤 인물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프레이리 만큼 굴곡과 파란이 많은 삶을 산 인물도 잘 없을 것이다. 그의 독특한 사상은 바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변증법적 지양의 산물이라 하겠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1921년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쿠주의 항구도시 헤시피에서 태

어났다. 프레이리의 아버지는 군의 하급장교였는데 집안 형편은 그런대로 안정된 중산층에 속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단란한 프레이리의 가정에 불행이 엄습해왔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자 전가족이 생계를 위해 헤시피 인근의 자보아탕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극도의 빈곤 그 자체였다.

새옹지마의 교훈이 말해주듯, 인간사에서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물질적 풍요를 잃은 대신 프레이리는 가난한 이들의 참상을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을 배워갔다. 훗날 프레이리는 자기 삶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 가난을 경험했던 것이며, 궁핍에 빠져있었음에 사회계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수 있었노라고 술회하였다 (Shor &Freire, 1987).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프레이리는 오스왈도 크루스 학교에서 7년의 중고교 과정을 마친 다음, 1943년에 헤시피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의 지적 분위기는 프랑스 학풍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는 프레이리의 초기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6년에 프레이리는 페르남부쿠주 산하의 사회산업부(SESI)에서 일하면서 농촌 빈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활동을 한다. 프레이리가 성인 문해교육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첫걸음이었다.

1954년 프레이리는 헤시피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59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동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이때부터 프레이리는 브라질 북동부의 기층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문해교육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1961년 쿠아드로스의 사임으로 골라르트 부통령이 정권을 물려받아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집권하기까지 프레이리의 문해방법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나 1964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이 중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은 프레이리를 불온한 인물로 몰아 투옥했다.

그러나 당시 프레이리의 사상적 성향이 그리 급진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가기 전까지 프레이리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자에 불과했다. 당시 투옥된 많은 사상범들이 형장의 이슬로 산화해갔건만 프레이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70여일 만에 감옥에서 나와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프레이리는 사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무엇보다 교육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프레이리는 볼리비아를 경유해 첫 망명지로 칠레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 성인 문해교육 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 활동을 같이 하는가 하면 칠레의 좌익혁명운동 기구들의 활동들을 지켜보게 된다. 당시 칠레는 1970년 아옌데 정권이 출범하기까지 진보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는데 프레이리는 그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게 된다. 프레이리의 주저 [페다고지]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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