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객관식 시험과 객관도의 허구

리틀윙 2011. 7. 5. 12:54

객관식 시험과 객관도의 허구

   

좋은 평가도구를 구성하는 3요소로 타당도, 신뢰도, 객관도가 있다. 이 가운데 이 글을 여는 목적상 ‘객관도’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객관도(objectivity)란 같은 문항을 놓고 여러 사람의 채점 결과가 일치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평가자 신뢰도’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무릇 사람이기 때문에 평가자마다 가치 판단 기준이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평가자들 사이의 주관성의 편차가 최소화된 경우를 객관도가 높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객관식 시험’은 순도 100퍼센트의 객관도를 보증한다.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도의 보증이 곧 교육적으로 좋은 평가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문) 다음 중 계몽사상가가 아닌 사람은?

① 루소 ② 볼테르 ③ 몽테스키외 ④ 로크

 

사회사상사에 약간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위의 보기 가운데 정답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문제에서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은 ④이다. 시험 후 어떤 총명한 학생이 “답이 없지 않냐”며 항의 했더니, 교사가 답변하길 “교과서에서 로크는 ‘계몽사상’ 단원에 나오는 인물이 아닌 ‘시민혁명’ 단원에 나오기 때문에 정답은 ④”라 했다 한다.

보다시피 정답이 없는 문제라도 학생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게 객관식 시험의 절대적인 룰이다. 그런데 무슨 실버보험 광고 문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말 것”을 학생에게 강제하는 말도 안되는 룰이 객관적일 수 없다. 말도 안되는 룰이 단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강제되기에 ‘객관적’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시험을 치르지 말고 제비뽑기로 순위를 매기는 것도 객관적이지 않은가?

 

물론, 표준화검사로 상징되는 양질의 평가에서는 위와 같은 황당한 문제는 출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일제고사의 폐단은 시험 자체보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상에서 빚어지는 문제가 해악한 것이다. 살인적인 경쟁 체제 속에서 시험 공부하느라 아이들의 심신이 망가져가는 것이나 국가수준 평가에서 좋은 성적 내기 위해 학교교육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따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과 관련한 문제로서 아이들이 십 수권의 문제집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이런 저런 객관식 문항을 만날 때 겪는 스트레스와 그 속에서 무조건 답을 골라내는 과정 속에서 단세포적 조건화 기제에 길들여지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가 경악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장차 아인슈타인이 될 아이도, 베토벤이나 피카소로 성장할 아이도 그런 반지성적인 기제에 조건화되어 갈 것이니 ‘묻지마 식 경쟁교육’은 결국 국가경쟁력에도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 미친 사회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갖다 부으면서 아이들 바보 만드는 미친 짓거리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이 이 사진을 안 봤으면 좋겠다. 무슨 문제집이 이렇게도 많은가?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총정리 문제집이 만들어져 유포되는 이곳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가?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를 원천봉쇄하는 객관식 시험은 학생의 창의적·비판적 사고까지도 원천봉쇄하는 점에서, 평가도구의 질을 떠나 결국 모든 객관식 시험은 반지성적인 폐단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친구와의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고민이나 현재의 파트너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을 비롯해, 회사에서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등의 이 모든 문제들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사물의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고 그때 그때 최선의 선택을 해가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인 것이다. 때문에 바람직한 사고 양식은 오직 철학적 사유의 훈련 과정을 통해서만 길러지는 법이다. 우리 교육이 진정으로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교육실천을 할 때 이 사회를 발전적이고 윤택하게 만들 훌륭한 일꾼들이 길러질 것이다. 지성적 수준은 아랑곳없이 오직 줄세우기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 비이성적인 교육시스템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재앙일 뿐이다. 객관식 시험, 최소한 초등학교에서는 사라져야 한다. 내가 그리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 초등학교 시험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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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교사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평가자의 주관성을 배제하여 객관적인 채점을 보증한다는 이유로 중등학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객관식 시험을 선호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선생님들의 말을 빌면, 평균 0.1점으로 내신등급이 왔다갔다 하는데 객관식 시험이 아니면 학부모나 학생의 불평불만으로 몸살을 앓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중등학교 교육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내놓기가 조심스럽다. 치열한 경쟁체제 속에서는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을 전하기보다 평가와 관련한 잡음 즉, 학부모의 민원이 제기될 소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등학교 교육관계자들의 최우선적인 입장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로 객관식 시험을 치른다면 이건 교육의 본말이 전도된 꼴이다. 이건 교육을 위한 평가가 아닌 평가를 위한 교육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현실에 굴복하는 것은 스스로 교육전문가임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전문직에 요구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자율성’이다. 자율성은 교사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도대체 대학교수와 초중등교사가 뭐가 다르길래 대학교수는 평가의 자율성을 누리고 초중등교사는 ‘안전빵’의 길을 가야만 한단 말인가? 교육전문가인 교사에게 자율성이 넉넉히 보장되지 않으면 바람직한 교육은 불가능하다. 평가와 관련한 교사 자율성의 회복, 이 문제는 현장교사들에 의해 먼저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작년 후반기 교과부에서 지금까지 내가 논한 객관식 일색의 시험체제의 문제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서술형평가를 권고하는 내용의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사들이 난색을 표한다고 한다. 왜 중등 교사들은 서술형 평가를 기피하는가? 학부모나 학생의 항의가 두려워서인가?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객관식 평가 체제에 무비판적으로 익숙해있지는 않은가? 혹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에 대한 고민 없이 OMR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안주해 객관식 문항을 선호하는 교사는 없는가?

 

 

 

아주 드물겠지만 서술형평가를 고집하는 중등교사도 있다. 사진은 부정변증법 선생이 출제한 중3사회 시험답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