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패전처리투수

리틀윙 2009. 3. 25. 16:27

 


온나라가 '야구'로 들떠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기에 지회장이란 역할이 마치 야구에서 ‘패전처리투수’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지회장이란 걸 맡았습니다.

승산이 없는 게임, 그렇지만 깃발을 내릴 수는 없는 입장. 누군가 깃발을 지켜야 하고 또 앞선 일꾼(전임지회장)이 너무 힘들어 보이기에 도의적 차원에서라도 역할을 넘겨받았습니다.

조합원수 150명 남짓한 소규모 지회인데, 지회집행위(분회장회의)를 열면 운영위원 빼고 분회장 자격으로 참여하는 조합원은 한둘 있을까 말까 한 조직입니다.

하긴 현재 조직 전체의 분위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회장으로서 조합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고민해봤습니다. 그 한 가지 아이디어로 매달 말일쯤에 “지회장이 드리는 ( )월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조합원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따뜻한 내용의 글 적은 뒤에 '추신' 형태로 조직 사업을 안내하고... 서명 용지를 첨부해 보내는 방식을 취하곤 합니다. 어차피 회신되는 서명은 소수일테니... 최소한 이런 방식이 더 나쁜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편지나 문자 보내면 답장이 오는데, 처음엔 순진하게도 반가운 맘으로 열어봤습니다. “뭐, 수고한다” 이런 말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안 그래도 탈퇴할려고 했는데 방법을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잘 만났다”는 식입니다.


이제는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아니, 현재의 우리 조직 모습을 보면 어쩌면 조합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조합원들이 고맙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연세가 많으신 분, 조합비를 많이 떼는 선배선생님들은 좀처럼 탈퇴를 하지 않는 점입니다.

분회장님들에게 인사차 전화를 쭉 돌리다가 50중반대의 여조합원선생님과 통화를 한 30분동안 했습니다.

“수고 하신다고, 아무 것도 못 도와드려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분은 저와 같은 학교에서 6개월 같이 근무했는데 그 당시는 비조합원이었습니다. 그 뒤 어떤 생각에서 비슷한 연배의 몇 분과 같이 조합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신세대 교사들과는 달리 이 분은 전교조 이전의 학교가 어떤 곳인지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노동조합의 소중함을 알고 계시는 겁니다.

전화를 끊고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탈퇴처리 왜 제때에 안 되냐"는 민원성 전화와 대조를 이루는 그 감동에 내 눈물샘이 자극을 받기도 합니다. 이 맛에 지회장 하는 건지......


한사람!

단 한사람에게 우리가 존재해야하는 의미의 끈을 붙들어 매고자 합니다.

이런 소박한 조합원선생님이 단 한분이라도 이 조직에 남아있는 한 누군가는 이 조직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읍내사거리에서 피켓팅 하면서 후배 일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1시간 동안 떨면서 한 사람의 시민을 설득할 수 있으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양으로 승부하지 말자. 바쁜 걸음 걷는 사람에게 선전지 억지로 떠안기지 말자. 그냥 서 있자. 말없이 그저... 약간 고생하는 척 하자. 그럼 사람들이 뭣 땜에 우리가 이 고생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교복입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몰려나옵니다. 어떤 녀석이 내 곁을 지나치면서 외칩니다.

“아씨(아저씨) 화이팅!”



패전처리 외에 할 일이 많습니다.

일이 힘든만큼 보람도 적지 않습니다.


묵묵히 몇 년씩 지회장을 맡으신 동지들, 그 자체로 존경스럽습니다.

분회가 조직의 꽃이라 하지만, (경북의 경우) 지회장이 전교조의 희망입니다.

지회장이 조직을 망치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이 조직을 이렇게 망쳐왔던가요?


참으로 씁쓸합니다.

격한 분노와 적개심이 입니다.

이걸 방관하면 안됩니다. 패전처리투수들이 묵묵히 공만 던져서는 안됩니다. 패전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어야 합니다.


아마도 책임을 져야 할 입장들은 "단결" 어쩌구를 내세울 겁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 이런 식이라면 이 조직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교조 집행부가 있다는 것은 다만, 뉴스를 통해서 "그저 있다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입니다. 이 나라 교육을 바꾸는데 터럭만큼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단결이라 함은 누구를 위해 뭘 단결하자는 말인지?


지도부를 구성하는 일 실세가 조합원을 겁탈하려하고 또 지도부가 '대동단결'하여 조직적으로 그것을 은폐하려 했다면, 그 조직상층부는 "단결"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입니다.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가 없습니다. 썩은 정파의 무리들은 이 사회의 운동판에서 매장시켜야 합니다.



안 그래도 별 매력이 없는 조직인데, 조합비는 교총회비보다 더 많이 떼고 해서, 탈퇴할까 말까 망설이던 터에...... 확실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지역에서 지회장/분회장들이 실컷 고생해서 농사 지어 놓으면 중앙의 지도부가 한방에 날려버립니다.


띵동!

지금 문자가 들어옵니다.

혹 또 탈퇴한다는 메시지 아닐까 걱정됩니다. 초보지회장, 문자에 노이로제 걸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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