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살이-2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리틀윙 2021. 2. 9. 07:50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 월요일에 내 강의를 들었던 분인데 강의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줄 수 있냐는 문의를 하셨다. ‘혁신학교 교육철학’이란 주제로 시도한 첫 강의였기 때문에 내 강의의 완성도에 대해 자신이 없었는데 이런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광주라는 지역의 특수성이나 강의 주제도 애착이 가서 나름 공을 들여 준비한 강의였기에 뿌듯한 것도 있지만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분이 교사가 아닌 관리자(교감)인 점이다.

 

연수 참가자 가운데 교장 교감 선생님들도 계신다는 사실을 강의 시작하기 직전에 알았다. 준비한 강의 내용 가운데 “학교 혁신을 위해서는 관리자가 먼저 혁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많이 들어 있어서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입장에서 다소 듣기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이분은 “이때껏 혁신학교 관리자로서 나름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관리자의 철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자극을 받았다”는 말씀을 주셨다.

 

전화상으로 나눈 대화에서 어투나 문체로 미루어 그리 투철한 진보적 의식을 지닌 분 같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저 소박한 교육관을 지닌 평범한 분처럼 느껴졌다. 소박할지언정 이렇듯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관리자가 점점 많아질 때 이 나라 교육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머지않아 진보/보수를 떠나 전국의 모든 학교 관리자들의 마인드가 이렇게 바뀌어 갈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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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군사정권기가 끝나고 김영삼의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 나라 교육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열린 교육’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열린 교육은 건설업자에게만 좋은 일 시켜주고 학교의 변화는 조금도 일궈내지 못했다. 관리자와 교사의 마인드를 열어야 열린 교육의 흉내라도 낼 수 있을 텐데 교실 벽을 연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학교마다 교실 벽 때려 부수고 교실바닥에 양탄자 깔고 하는 러그미팅(rug meeting)이라는 수업이 유행하다가 정권 바뀌면서 열린 교육은 유야무야 되었다.

 

교실 벽 허문 것 외에 실제로 ‘연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나는 이 열린 교육이 대한민국 학교교육 혁신의 맹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 부조리와 부정부패 그리고 폭력이 난무했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 “너거 아부지 머 하시노?”가 표상하듯 교사가 학생을 개 잡듯이 잡아도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지금 나쁜 학부모와 학생이 교사를 힘들게 하면서 교권 실추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교사들이 ‘아, 옛날이여!’의 정서에 침잠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현금의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극심한 문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봐야 한다. 사회의 발전은 진자운동 형태로(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전에 우측으로 한껏 치달았던 나침반 바늘이 지금 좌측으로 많이 가있는 상태일 뿐이다. 좌와 우를 오가면서 마침내 중심을 잡아갈 것이다.

 

학교 변화의 나침반 바늘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변곡점으로 작용한 것이 ‘열린 교육’이라고 나는 본다. 교실 벽 여는 것에 그칠지언정 “현재의 교육에 문제가 있고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는 사고(thought, 사상)가 교육자들 사이에 공유되기 시작한 자체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엄청난 변화”임을 말해주는 흥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면,

 

1994년으로 기억한다. 지역에서 열린 교대 동문회에 참석했는데, 배구 끝나고 술자리에서 당시 교육계에서 떠오르고 있던 ‘열린 교육’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어느 선배의 이야기가 충격이었다. 선배 왈,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육청에서 열린 교육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몰래 숨어서 읽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아니고 열린 교육 이론서를 숨어서 읽다니! 젊은 선생님들은 무슨 “전설 따라 삼천리” 듣는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지난 주 광주 민주묘역에서도 느꼈지만 대한민국 정말 많이 변했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보다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역동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가장 안 변하는 곳이 학교였는데 지금은 학교도 해마다 급격히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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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변화의 중심에 ‘혁신학교’가 있다. 주지하듯이 혁신교육의 메카는 경기도다. 김상곤 교육감이 제도권 학교에 혁신 드라이브를 걸 때, 참모진들은 관리자들의 강한 반발을 예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엇보다 학교 예산을 한 푼 더 얻기 위해서라도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관리자의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힘으로 혁신을 “강제”하는 것만으로는 학교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의 의식 혹은 마인드는 정상분포곡선을 이룬다. 맨 왼쪽에 급진적인 개혁파가 있고 맨 오른쪽에 복지부동의 온건파가 있다. 이 둘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은 현실을 냉철히 읽어내고 따뜻한 실천을 성실히 해내는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발전해간다. 사회의식의 정상분포곡선에서 중간 지대에 있는 분들은 이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의 선한 영향력에 말미암아 점차 왼쪽으로 옮아오게 된다. 중도파들이 왼쪽으로 이동하면 극우들도 어떻게든 변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우5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우4 혹은 우3으로 좌향 앞으로 가고 우3은 우2로 우1은 좌1로 향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해간다.

 

지역에 따라 학교에 따라 이 혁신의 온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변화 자체는 필연이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도도히 흐르는 ‘학교혁신’의 강물을 제 아무리 보수적인 관리자라도 거스를 수는 없다. 변화가 대세이고 혁신이 상식으로 자리할 때 모든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The rational is real, and the real is rational.

 

헤겔 변증법의 진수라 할 이 한 문장이 학교혁신의 현주소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 명제는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이성은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반대로 합리성(영어에서 rational은 ‘이성적’과 ‘합리적’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이 결여된 현실은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 이성과 현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열린 교육 서적을 숨어서 읽던 시대에서 ‘혁신의 이성’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그 이성이 현실 속에서 교육자들에게 공유되는 만큼의 현실성을 품었다. 94년 경북에서 그 이성은 장학사의 서랍 속에 갇혀 있었다. 이것이 당시 교육의 현실이었다. 그 뒤 진보교육감 시대가 도래하면서 ‘혁신의 이성’이 현실에 뿌리내렸다. 현실의 변화가 이성의 확장을 견인한 것이다. 현실 속에 뿌리를 깊게 내린 지역의 교육자들에게 혁신은 상식이 되었다. 머지않아 이 땅의 모든 학교에서 혁신이 상식으로 자리할 것이고, 몰래 숨어서 열린 교육 책을 읽던 장학사 이야기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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