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살이-2

학생이 행복해야 교사도 행복하다!

리틀윙 2021. 1. 27. 11:37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김** 교장님께서 어제 나의 글에 대한 귀한 의견을 댓글로 남기셨다. 교장 샘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A) “교사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이 제로섬게임으로 작동한다”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B) (그 근거로) 학교 경영자로서 두 집단이 동시에 행복할 수 있음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교장 샘의 유연한 반론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의 사고를 더욱 생산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토론 당사자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로 핵심 낱말에 대한 용법(terminology)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경우가 있는데, 지금 나의 글에 대한 김 교장님의 반론이 그러하다.

 

A)에서 내가 말한 ‘행복’과 B)에서 교장 샘이 말씀하신 ‘행복’은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나는 이 두 행복 개념을 각각 ‘수동적 행복’과 ‘능동적 행복’으로 규정하면서 나의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줄 때 보다 무엇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낀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열정을 쏟아 어떤 일을 하기보다 일을 안 하거나 최대한 적게 하는 것이 행복한 일상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수동적인 행복관이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하게 된 이유가, 주는 것(giving)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본다.(이것은 [사랑의 기술]의 작가 에릭 프롬의 논리를 원용한 것이다.)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에 의하면, ‘주는 것’은 “나에게 속한 무엇을 포기하는 것, 상실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가를 전제로만 무엇을 주며, 반대급부 없이 무엇을 주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형태를 띤다. 이 능동적인 행복은 받을 때보다는 줄 때, 일을 안 할 때보다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때 생겨난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상황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경작해 가는 것이다.

 

나는 이 이치를 작년 코로나 상황에서 가을 운동회를 치르면서 깨달았다. 2학기에 부임해 오신 교장선생님께 학년부장회의에서 “아이들에게 운동회를 돌려주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셨다. 이에 그 자리에 있었던 부장교사들이나 회의 결과를 전달받은 모든 교사들이 난감해했다. 운동회는 학년 별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우리 3학년이 스타트를 끊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즐거운 운동회를 선사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냈다. 집단지성을 쏟아내는 과정에서 연거푸 “맞다. 그게 좋겠다!”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함께 한 어느 후배로부터 “두 선배님(나와 학년부장교사는 동갑내기 원로교사다)의 눈빛에서 행복감이 전해져 와서 짠하다”는 촌평을 듣기도 했다.

 

 

우리 학년에 이어 나머지 학년에서도 행사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하여 전교생이 모두 즐겁게 운동회를 마쳤다. 3학년 수학 마지막 단원이 통계(표와 그래프)인데, 교과서에 “올해 학교행사 가운데 우리 반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표로 나타내봅시다”라는 문제가 나왔다. 네이버 학급밴드에서 투표를 부쳤더니 운동회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이어달리기에서 자기 팀을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봤을 때나 투표결과를 보면서도 나는 올해 우리가 가장 잘 한 일이 “아이들에게 운동회를 돌려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지점이 김 교장 샘이 말씀하신 “교사의 행복과 학생의 행복이 일치하는” 경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이 행복하다”는 명제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p → q”에서 가정(p)과 결론(q)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위의 사례는 교사의 행복이 학생의 행복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학생의 행복이 교사의 행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학생이 행복해야 교사도 행복하다!

 

존재의 근본 속성은 모순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두 주체는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입장에 있다. 학교에서 관리자와 교사 사이는 물론 교사와 학생 사이도 기본적으로 모순적인 관계다. 내가 ‘제로섬게임’ 운운한 것은 이런 이치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심오한 철학적 담론이 아닌 상식 그 자체다. 비근한 예로, 어제 글에서는 중간놀이시간과 점심시간의 시량에 대해 언급했다.

 

관계는 근본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학생의 행복을 위해 교사가 마냥 헌신해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 학교 운동회가 미담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올해 열린 유일한 학교행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학교장이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이런저런 과업을 떠안기면 교사의 사기와 의욕은 저하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피해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교사가 불행하면 학생도 불행해진다!

 

교사가 불행하면 학생도 불행해지기 때문에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는 말은 맞지 않느냐?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어제 글에서 논했듯이, 현실 속에서 교사의 행복을 위해 학생의 행복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리고 교사의 행복을 강조하는 사람이 학생의 행복을 걱정하는 경우를 나는 잘 보지 못했다.

 

1.10.

'교실살이-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천과 깨달음  (0) 2021.01.27
분노한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응대하기  (0) 2021.01.27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  (0) 2021.01.27
과잉 금기  (0) 2020.04.04
좋은 교장  (0) 2020.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