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우월한 수능성적이 우월한 지적 역량을 보증하는가?

리틀윙 2021. 1. 27. 09:37

영어몰입교육이 한창 강조될 시기였다. 초등 현장에서 영어전담교사들에게 영어 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증표로 TOEIC 또는 TEPS 시험 응시가 권장되는 분위기에 편승해 나도 몇 번 도전해봤다. 토익은 한 번, 텝스는 두 번인가 쳤는데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았다. 토익은 700 후반, 토플은 600 후반의 점수였다. 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서 속상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해서 다시 도전해볼 생각은 접었다.

 

빈 말이 아니라 마음먹고 몇 달 준비하면 150점 정도는 충분히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보다 영어공부에 각별히 욕심이 많은 사람임에도 내가 재도전을 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영어 실력 증진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입사를 목적으로 하는 취준생이라면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토익 시험이 요구하는 알고리듬에 길들여지기 위한 특단의 노력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교육학 영어 원서 읽는 것이 지적 성장은 물론 영어 실력 증진에도 훨씬 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

 

페이스북에서 30대 초반의 지인이 고3 때 영어 점수가 낮아서 고액 과외를 받아 성적을 올렸다는 경험담을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길, “과외를 통해 영어 실력 자체가 향상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외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은 문제를 푸는 요령을 배운 것이 전부이고 그 요령은 성적 향상으로 직결되었다는 말입니다.

 

2017년 수능영어 시험지의 한 면을 통째로 발췌해본다.

 

 

25번 문항은 잭 니콜슨 주연의 훌륭한 영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와 모차르트의 일대기를 그린 [아마데우스]의 감독 밀로스 포먼에 관한 글이다. 여담이지만, 학창시절에 내가 영어 공부를 특별히 좋아했던 이유가 영어 공부하다 보면 이런 흥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글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험지의 또 다른 문항에서는 재즈 피아니스트 키쓰 재릿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놀랍게도 장문의 지문이 단 한 문제를 위해 제시된다. 그래서... 불쌍한 우리 학생들은 이런 흥미 있는 글들에 “정서적으로” 빠져들 여유가 없다. 1초라도 아껴 정답만 골라내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능 고득점의 관건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흥미 있는 글을 다 읽는 것은 “바보 짓”이다! 나는 이 광란의 시험공화국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교1등이 양산되는” 기제가 이런 것이다.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을 뿐 이곳은 전쟁터다.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내가 살기 위해선 내 경쟁자보다 1초를 아껴 정답을 골라내야 하기 때문에 밀로스 포먼의 삶이나 작품세계 따위에는 신경을 꺼야 한다.

 

감상주의라는 사치를 폐기하고 “잔머리”에 의존하기! 이게 수능 고득점의 비법이다.

 

시간을 아껴 정답을 고르는 잔머리의 철칙은 “지문보다 주어진 보기를 먼저 읽고 각 문항에서 키워드를 0.1초 만에 찾은 다음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거꾸로 지문을 읽어가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에서 5번이 정답이다. 5번은 ”단독으로“라는 표현에서 뭔가 답일 것 같은 감이 온다. 이런 감을 가진 학생은 1번부터 4번까지 일일이 대조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감은 우리 삶에서 장점으로 쓰일 일이 전혀 없는 점이다.

 

26번, 27번 문항도 이런 잔머리로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시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다음 보기를 읽는 것은 금물이다. 말하자면, 출제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오로지 정답 고르기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시험 문제를 제작한 대학교수가 이 문항을 통해 학생의 실력을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독해능력이기 때문에 지시문을 다 읽는 게 바람직하려만, 학생 입장에서는 그런 정도(正道)에 충실하면 자기 인생이 망한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는 출제자의 무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식 시험에 내재한 구조적인 한계 탓이다.

 

28번은 위의 요령이 통하지 않는 문제다. 이 문제의 정답은 (5)인데, 아마 주어인 ‘the aged’에서 ‘the+형용사’는 복수로 쓰이기 때문에 동사가 was가 아닌 were를 써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텝스(TEPS)에서도 “다음 중 문법적으로 잘못 된 것은?”이란 식의 문제가 어렵다. 그런데, 수험생의 실력을 변별하기 위해 배치하는 이른바 ‘킬러 문항’은 해당 학문의 역량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알면 좋지만 몰라도 되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 28번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텝스 따위의 시험에서 만나는 킬러 문항들이 실제 영어 공부 상황에서도 장애가 되는 경우는 단언컨대 없다. 그런 문제들은 원어민들도 해결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을 구사했다고 해서 흠 잡힐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도 한글 맞춤법을 100퍼센트 정확히 구사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정리하면,

 

1. 수능이든 뭐든 시험 점수가 학습자의 지적 역량을 그대로 대변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등급 학생이 9등급 학생보다 더 유능할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1등급 학생보다 3등급 학생이 더 똑똑할 수도 있다.

 

2. 수능성적 올리기 위해 죽도록 공부해봤자 지적 성장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객관식 문제에 내재한 태생적 모순으로 인해 학생들은 잔머리만 발달하게 되고 인식론적 호기심이나 학문에 대한 흥미는 사그라든다.

 

3. 결국,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 발전에도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시험은 폐지해야 한다.

 

영어나 수학 시험은 그나마 학습자들의 실력 차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시험 점수가 곧 영어/수학 실력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지만, 문학(국어)이나 사회탐구 분야의 수능시험이 학생의 학문적 역량을 얼마만큼 정확히 예언할지 나는 극도로 회의한다.

 

생활과 윤리(생윤) 기출 문제를 풀면서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어렵고 방대한 공부를 어떻게 해내는지 놀랐는데,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수능 만점자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내가 문제를 푼다면 80점도 잘 못 맞을 것 같은데 우리 학생들은 어떻게 이런 신기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학생들의 지적 역량이 나보다 뛰어난 것일까?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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