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주 연속으로 토요일에 일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경북교육연구소공감 주관으로 열린 ‘기초학력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했고 어제는 경북초등학생중창대회에 참여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행사이지만 바람직한 학생교육에 관한 이슈로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나는 본다.
사물은 항상 두 측면을 지니기 때문에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 문제는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과 수월성을 함께 생각하며 접근해야 한다. 이 두 대립적인 가치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너무 쉽게 저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현장에서 진보를 지향하거나 보수를 지향하는 교육주체들 모두 이러한 오류를 답습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혁신교육을 지향하는 지역이나 단위학교에서 학생의 기초학습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교육은 성장이다. 학생의 학습력이 저하되는 교육기관은 그 자체로 자구 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진보(進步, progress=앞으로 나아가기)가 아니다. 반면, 수월성(excellence) 추구라는 미명하에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은 고민하지 않고 그저 성적 올리기에만 급급한 교육시책은 반교육적이다.
어제 중창대회가 열리기 전에 대회 주관 기관인 경상북도교육청문화원에 중요 직책을 맡고 계시는 선배님과 독대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문화원에서도 대회가 너무 과열되는 것이 문제이니 참가자들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축제 마당으로 열 생각을 했는데, 그럴 경우 과연 학교에서 몇 팀이나 참가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지도교사나 학생들이 의욕을 갖고 대회를 준비하지 않을 것이며, 학교에서도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담당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그리 깊이 고민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의 의견을 간략히 적어 본다.
첫째, 학교의 참여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교육청에서 예산을 배정하여 참가학교에 충분한 경비를 지급하면 된다. 현재는 교육청에서 학교에 한 푼도 지원하지 않고 순전히 학교예산으로 모든 준비를 하는데, 입상 욕심을 낼수록 출혈이 심한 형편이다.
둘째, 경연대회든 축제형식이든 대회는 가을에 열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농사와 같이 일정한 한 해의 싸이클에 따라 돌아가는데, 봄에 대회를 여는 것은 씨 뿌리는 시기에 수확을 하려는 것 만큼이나 학생 성장의 원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이 대회를 위해 3월부터 무리하게 준비를 했다. 6학년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3월부터 새로운 학생들을 멤버로 보강하여 아침 시간에 학생들을 연습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이 속한 학급담임교사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생각건대, 가을에는 교육청 단위의 행사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분산시키기 위해 이 대회를 5월에 여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어쨌거나 학교 현장에서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무리와 편법을 좇게 되는 역기능이 심각한 실정이다.
끝으로,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해 시상을 전제한 대회를 열어야 한다면,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하는 것을 제안해 본다. 아마 학교에서 학생평가는 몰라도 대회에서 ‘절대평가제’를 도입하는 것은 전례가 없을 줄로 안다. 학교에서 치는 시험이든 교육청 주관 대회든 모든 ‘서열 매기기’는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을 전제로만 정당성을 지닌다. 이런 이치에서 교육청 대회에서도 절대평가제를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제 대회에서 18개 팀이 참가했는데 대상-금상-은상-동상의 영광은 7개 팀에게만 주어지고 나머지는 ‘장려상’이었다. 장려상은 학생 성장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낙방의 고배를 의미한다. 어제 참가 팀 가운데 준비가 부실한 팀도 분명 있었다. 이런 팀이 (말하자면)제8위 팀과 똑같이 ‘장려상’을 받는 것은 공정한 평가일 수도 합리적인 동기부여 책략일 수도 없다.
내가 말하는 절대평가제의 중창대회는 태권도의 승급심사와도 같다.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참가자에겐 ‘우수상’의 영광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참가상을 주는 것이다. 현재의 상대평가 시상제도는 과열을 부추길 뿐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을 돕지는 못한다.
교육의 수월성과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 문제는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는 배척할 문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진보 혹은 보수의 이름으로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는데, 어떤 경우에도 그에 따른 역기능에 대한 진지한 성찰 뒤에 더 나은 방향을 계속 고민해가야 한다.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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