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쓸모는 채움이 아닌 비움에 있다. 그릇에 무엇을 담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은 아이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무엇을 채워줄 욕심으로 학교 공부 마친 뒤에도 학원을 여러 군데 보낸다. 없는 살림에 아이로 하여금 학원을 한 군데라도 더 다니게 하려는 뜻은 돈을 들이는 만큼 한 자라도 더 배울 수 있다는 것일 테다.
한 자라도 더 배우면 아이의 지적 그릇이 커지리라는 기대는 상식적으로 합당하다. 책상에 10분이라도 더 앉아 있으면 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양적 발전’일 뿐이다.
질적 발전은 그릇을 채울 때보다 비울 때 일어난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에서 보듯,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들은 예외 없이 머리를 비울 때였다.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통찰이나 영감도 그러하지만, 깊이 있는 사색 또한 숨 막힐 듯한 ‘열공 모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큰 성장은 몸과 마음을 텅 비울 때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방학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성장이 일어나는 시점이다. 어원상 방학(vacation)은 ‘텅 비우다’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 vacatio’에서 유래한다. 고3수험생이라면 몰라도, 초등학생은 방학 때 실컷 놀게 해야 한다. 근시안적인 양적 성장에 눈이 멀어 옆집 아이보다 학원을 한 군데라도 더 보내려는 욕심은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불과 4주 간의 짧은 방학이지만, 부쩍 성장해 돌아온 아이가 몇이 있다. 1학기 때는 자기조절 능력이 부족해 수업시간에도 늘 한 눈 팔거나 장난을 일삼던 아이가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가 며칠을 갈까 의구심도 품었지만, 개학한지 2주가 지나도 유지되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방학은 아이를 성장시킨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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