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론

동방예의지국

리틀윙 2019. 3. 28. 13:57

 

어릴 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즉 애국심이 무척 강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가 다 그랬다. 아마 요즘 아이들보다 10배 정도 더 강했을 것이다. 날 때부터 애국심이 강했을 리는 없고, 우리의 남다른 애국심은 순전히 교육의 결과이다. 그 교육은 전문용어로 이데올로기 교육’, 일상적 용어로는 세뇌교육이라 일컫는 것이다.

 

학생들의 두뇌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강력히 심어 주는 도구는 말이었다. 말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비고츠키의 멋진 문장을 인용하면, “하나의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나라 사랑하는 의식을 기르기 위해 뜻도 영문도 모른 채 몇몇 낱말들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 중 하나가 동방예의지국이란 낱말이다. 도덕/사회 시험지에 단골 주관식 문제로 출제되는 낱말, 지겨운 애국조회 때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에서 빠지지 않는 낱말이 동방예의지국이었다.

 

어른이 되어 제도권교육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운 독서와 사색을 통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우주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는데, 그 첫째는 이 말이 생겨난 배경에 관한 문제다.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나라라는 명명은 중국이 우리나라에 붙여준 것이다. 땅덩어리가 큰 중국은 수시로 변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서 곤혹을 치렀는데 유독 동방의 오랑캐(東夷)인 동이족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고려 말 무관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했을 때 그 부하인 이성계는 자식이 부모를 칠 수 없다는 논리로 반란을 일으켜 고려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세웠다. 그 뒤로 조선은 중국의 속국(작은 중국, 小中華)을 자처하며 해마다 각종 공물과 심지어 꽃다운 처녀들을 바치며 예의를 갖추었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작위를 부여했으니, 이것은 오늘날 직장 상사가 뇌물 잘 바치는 부하직원더러 인사 잘 한다며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격이다.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우리 의식의 소우주라 하겠다.

 

동방예의지국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두 번째 이유는 이 말의 사실성에 관한 것이다. 그나마 우리 어린 시절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의가 중시되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가고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미덕으로서의 예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인과관계는 학창시절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우리 의식에 불어넣은 또 다른 소우주인 한강의 기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오직 앞만 보고 급속도로 달려온 결과 대한민국은 영혼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관계는 철저히 물화되어 사람이 사람을 오직 돈으로만 만난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영혼이 없는 사회에서 예의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예의가 존재한다면 오직 갑과 을의 관계에서뿐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김영란법이 제정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갑에 대한 지나친 예의는 을에 대한 무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람들은 과도한 위계질서 속의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직장 밖에서 만나는 다른 사회적 약자를 향한 갑질로 푼다. 가부장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을 중의 을이다. 여성 가운데도 가장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남성에게 웃음을 파는 여성이다.

 

박정희 때 시작된 전 국민을 향한 애국심 유포 정책은 전두환 때 그 절정을 이루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전두환정권이 막 시작될 무렵 애국심 유포의 끝판왕이라 할 [대한민국]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는자유 대한민국이다. 가부장 한국사회에서 그렇고 그런 남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뭔가? 오입의 자유다.

 

이 오입자유국가에서는 자판기에 동전 넣고 커피 뽑아 먹듯이 성욕을 쉽게 채울 수 있다. 가부장남근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어느 지역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 자유의 정신이 얼마나 강했으면 지방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외국에까지 나가서 보도불러달라고 하다가 나라 망신 다 시키고 돌아온다. 그런가 하면, 때를 같이 하여 빙상계의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 체육지도자라는 남성들의 입에서 우리 애들 있는데 룸살롱엔 왜 가?”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꽃다운 선수들이든 유흥업소의 여성들이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리고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남근우월주의에 경악해 마지않는다.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로서 그늘진 곳에 있는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동전 넣고 원하는 대로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일 따름이다. 쇼트트랙 최강국에서 올림픽 금메달 창조의 이면에 이 반인륜적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지방의원의 추태와 맞물려 이 사건으로 세계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이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에는 없는 것이 없다. 보도도 있고 키스방도 대딸방도 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예의 빼곤 다 있는 나라다.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오입지국이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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