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의 명문 D고 1회 졸업생이다. 지금도 이 학교를 명문고로 쳐 주는지 모르지만,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 신설 학교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높다고 명문고로 부상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 학교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말하지만, 우리 학교가 명문이 된 것은 순전히 ‘빠따의 힘’이었다.
우리 학교와 같은 운동장을 쓰는 같은 재단의 D중학교엔 하키부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의 어느 악명 높은 체육 선생이 여기서 하키스틱을 공수해 와서 수시로 우리를 (전문용어로) “공갔다”. 담배 피다 걸린 녀석은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고 체육시험 성적 내려간 아이들도 맞았다.
이 양반은 일종의 ‘구사대’였다. 당시 재단의 교육방침은 “아흔아홉 마리의 온전한 양을 위해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은 과감하게 내쫓는” 매뉴얼을 추구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으로서 다른 학교 같으면 별 문제가 안 될 아이들도 약간의 일탈적 조짐을 보이면 바로 정학 때리고 두 번 걸리면 퇴학시켜 버렸다.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한 일벌백계의 이 고강도 전략의 선봉에 있었던 양반이 이 체육선생이었고, 그의 필살기가 하키스틱이었던 것이다.
하키스틱에 맞아 본 적이 있는가? 중학교 때 밀대자루로 맞을 때는 운 좋으면 앞에 친구 차례에서 빠따가 부러지곤 했지만, 대나무를 여러 겹으로 묶어 만든 하키스틱은 얼마나 질긴지 때려도 때려도 끄떡없다. 하키스틱으로 공굴 때마다 아이들의 비명은 하늘을 찌르듯 했고 그 비명 소리에 비례해 학교의 성적도 올라갔다.
이것이 신설 D고가 단기간에 명문고로 부상한 비하인드 스토리이고, 내게 그것은 ‘살인의 추억’ 아니 ‘빠따의 추억’으로 표상된다.
오늘 체육시간에 아이들이 플라스틱 스틱으로 하키 하는 모습 보면서 잠시 그 추억에 젖었다. 나는 초중고 통 틀어 체육시간에 하키 비슷한 게임도 못해 봤건만 이 학교 아이들은 저렇게 호사를 누린다. 부디 이 아이들은 하키스틱을 보며 ‘빠따의 추억’을 갖지 않도록 자라길 바란다.
2016.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