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일찍 출근하셔서 차량진입금지 라인을 치고 교문 앞에서 교통안전 도우미 직무를 수행하신다. 8시도 안 되었는데, 아이들 통학버스는 8시30분이 되어야 도착하건만 왜 저리 일찍 서 계시는 걸까? 아마도 선생님들 차량까지 안전하게 안내하실 생각이신가 보다. 그런데 오늘 날씨 상당히 춥다. 빗속에 걸쳐 입은 저 우의 속에 따뜻한 옷은 챙겨 입으셨는지 걱정이다.
어르신은 작년부터 이 학교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몇 년 전에 상처하고 혼자 계시는 당신의 입장에선 아마 이 일을 통해 경제적 만족은 물론 자아실현의 긍지와 흥미마저 느끼시는 것 같다. 주황색 방향지시봉을 들고 우리 운전자들에게 사인을 건네실 때는 왠지 버킹검 궁전 따위의 근위병에게서 볼 수 있는 기풍이 느껴진다.
어르신이 받는 월급은 70만원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어르신은 자기 노동에 비해 이 돈이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젊은 시절 마을 근처에 있는 채석장에서 돌 짊어지고 나를 때에 비하면 이 일은 호사라 하신다.
사실, 어르신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시대착오적(?) 경제관념은 그리 낯선 현상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딱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다. 70만원이라는 돈이 엄청 크게 느껴지는 이 분들은 그럼에도 자식은 물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눌 마음 씀씀이가 있다. 이 분들에게서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의 지독한 개인주의나 탐욕 따위는 엿볼 수 없다. 말하자면 이 분들은 자본주의이전의(precapitalist) 인성의 소유자들이시다.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는 세 종류의 인류가 혼재되어 살고 있다. 19세기 공동체적 소박한 심성의 백성인 어르신들과, 어릴 적 적절한 가난을 경험하면서 물질적 풍요의 소중함을 아는 20세기형 천민자본주의 시민인 우리 세대, 그리고 21세기의 나보다 젊거나 어린 인류는 뭐라 일컬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구상에 이런 독특한 사회가 둘도 없을 것이다.
'삶과 교육 > 삶과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펙이 인간 지성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없다 (0) | 2017.06.23 |
---|---|
공부 (0) | 2017.02.15 |
소외된 노동 (0) | 2016.04.11 |
네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라! (0) | 2015.11.27 |
혁신교육 비틀어 보기 (1) 학력과 평가에 관하여 (0) | 2015.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