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

리틀윙 2016. 1. 2. 07:58

제가 책임번역자로 번역 작업을 주도해서 만든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 Freire for the Classromm]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번역 탈고는 8월에 했는데 출판사 사정으로 이제야 출간되네요.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4445908&orderClick=LAG&Kc=#N

 

프레이리의 사상을 현장 교육에 접목시킨 것이나 프레이리와 비고츠키를 연결지은 점에서 이 책은 탐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책 말미에 제가 쓴 역자후기를 올립니다.

 

 

 

 

<옮긴이의 말>

 

1970[피교육자의 교육학]이 출판되었을 때 전 세계의 지식계에서 프레이리 신드롬이 일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에서 그를 초빙해 강의를 맡기는가 하면, [피교육자의 교육학]은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75만부가 인쇄되어 읽히고 있다. 국내에선 이 책이 1970년대 중반에 [페다고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운동권을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당시에 이 책은 오래도록 금서로 취급되었는데, 1988년 초등학교 교사로 현장에 첫 발을 내딛었던 글쓴이도 몇몇 교사들과 이 책을 숨죽이며 읽어 갔던 기억이 있다.

브라질이라는 변방에서 건너온 한 교육학자의 책이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무엇보다 그가 실천하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프레이리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의미하는 프락시스의 진면목은 다름 아닌 프레이리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제 3세계의 실천가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은 것이나 제도권으로부터 금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사상이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그의 사상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한계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프레이리의 이론은 브라질이라는 특수한 토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성인 비문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선진사회의 제도권 학교교육에서 적용될 여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 Freire for the Classroom]는 바로 이 같은 회의적인 시각을 말끔히 떨어 없앨 위력적인 책이다. 프레이리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저작물 가운데 프레이리 이론을 학교차원의 교육실천에 적용할 수 있게끔 고안된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987년에 발간되어 현재와 시차가 적지 않은 것이 중대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당시 미국사회의 시대적 배경은 신자유주의의 보수적 경제논리가 교육의 가치를 잠식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상황과 닮은꼴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의 유효성은 충분하다.

이 책이 시의적절한 또 다른 요인은 현재 우리 교육학계나 교육자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이 프레이리와 절묘하게 만나는 부분이다. 두 사람은 공히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 변혁을 위한 도구로서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비고츠키는 개인의 언어구사 역량이 개인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달해간다고 하는데, 이는 프레이리가 말을 통한 세상 읽기(reading the world by word)를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논문집 형식의 이 책 집필에 참가한 많은 프레이리언들은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을 프레이리식 비판적 문해교육에 접목하여 참신하고도 정교한 실천적 방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또한, 교사교육정책에 관한 고민(1)에서 시작하여 비판적 독서교육(7), 방언 교육에 관한 이슈(8), ESL 교육과정(9), 페미니즘 교육(10) 등의 폭넓은 참조 영역을 다루고 있는 점이 큰 자랑이다. 특히, 현장 교육에서 비판적 지식과 가장 거리 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수학교과에 대해 비판적 수학교육의 실천 사례를 제시하는 11장은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 중의 하나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모든 책이 그러하지만 이 책은 결코 흥미로 읽을 대상은 아니다. 논문집이니 만큼 프레이리의 다른 책들보다 더 딱딱하고 난해하게 다가갈 지도 모른다. 그러한 난점을 생각하여 우리 역자들이 고민한 것은 프레이리와 비고츠키 이론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역자주를 상세히 다는 것이었다. 그 분량이 다소 지나치다는 반성이 들기도 하지만, 두 사상가의 이론이 생소한 분들에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프레이리 교육이론의 실천적 측면은 문해교육으로 압축된다. 이 책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또한 그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해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교육수준은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에서 극과 극을 치닫는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를 보유한 우리 국민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실질문맹률에 관한 통계는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생활정보가 담긴 일상문서 해독력이 OECD회원국 가운데 꼴찌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더 나아가, 프레이리적 의미에서의 비문해 수준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프레이리에게 문해란 비판적 문해 능력을 의미한다.

형식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인 나라에서 실질 문맹률은 OECD 최고 수준을 보이는 것이나, 국제학생평가(PISA)에서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국민의 정보해독 능력이 최저인 것은 이 나라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그대로 말해준다. 우리 교육은 한마디로 학생들을 찍기 선수로 길러내고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사고력은 점점 퇴화해 가고 있다. 사지선다형 문제 풀이에는 강한 면모를 보이는 학생들이 약간이라도 사고를 요하는 문제를 만나면 쉽게 포기한다. 학생들은 숙제 많이 내주는 교사보다 질문 많이 하는 교사를 더 싫어한다.

도무지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학생들의 자화상은 이 나라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해준다.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문제집을 가까이 하고 양서는 멀리 해야 하는 교육시스템은 국가경쟁력에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베토벤 될 아이도 셰익스피어 될 아이도 모두 다음 중 ~가 아닌 것은?” 하는 식의 문제풀이만을 강요하는 곳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인재가 길러질 것인가? 독서와 사고를 기피하고서 TV 예능프로그램이나 스마트폰 게임에만 열중하는 천민자본주의 세태는 프레이리가 말한 대중화된(massified) 사회의 전형이다.

다행히 최근 현장에서 이런 문제점에 대한 각성이 일면서 혁신교육 진영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사 주도의 일방적 수업을 지양하고 학생 중심의 수업을 위한 대안으로 배움의 공동체와 수업의 질적 이해, 프로젝트형 수업이 전국의 교실에서 들불처럼 확산되어 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새로운 교육과 관련한 이 모든 실천 방안을 아우르는 고갱이가 프레이리 교육이론에 들어 있음에도, 현장교사들이 비고츠키나 존 듀이, 프레네, 사토 마나부 등에 비해 프레이리에 대해서는 주목을 잘 하지 않는 점이다. 프로젝트 수업이든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든 그 핵심적 전제조건은 교사-학생이 대등한 교육 주체로 만나는 것인데, 이에 대해 프레이리의 대화적 교육이란 개념보다 더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을 제공하는 사상체계는 드물다.

생각하기를 멈춘다는 말은 질문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인식론적 호기심을 갖고 있건만, 과도한 은행적립식 교육이 학습자의 질문욕구를 질식시켜 가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말한다: 질문이 없이는, 프락시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인간으로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word)과 함께 세상(world)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천하고 다시 질문하고 다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성장시켜 간다.

교사의 일방적 설명보다 학생의 질문이 살아있는 수업을 꿈꾸는 교사, 질문이 넘쳐나는 교실을 소망하는 교사는, 은행적립식(banking) 교육의 대안으로 프레이리가 제안한 문제제기식(problem-posing) 교육에서 뜻 깊은 지적 해후를 경험할 것이다. 교실에서 그런 혁신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참조틀로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거친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20158

역자들을 대표하여 이성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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