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민주주의와 교육] 9장 3절, 교육목적으로서의 교양

리틀윙 2015. 5. 29. 22:47

어제 [민주주의와 교육] 독서토론(세미나)에서 이야기 한 것을 글로 정리해 본다.

우선, 존 듀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을 일러두고자 한다. 듀이의 난해한 교육사상은 변증법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할 때만이 제대로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다.

 

9장 3절(교육목적으로서의 교양)에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 단락(문단번호21)>
‘culture’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넓은 의미로 ‘문화’라 하지 않고 ‘교양’으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다음 문장,

 

“교양은 적어도 무엇인가 세련된 것, 원숙한 것을 의미하며, 조잡하고 덜 된 것에 반대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21-2, 21번 단락 둘째 문장)

 

세련된 것(something cultivated) - 이홍우씨 특유의 의역은 좋은데, cultivated는 ‘다듬어 진’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 싶다. 듀이가 이 표현을 쓴 것은 ‘culture’와 ‘cultivate’는 어원이 같다는 것을 드러내고 함인데, 이홍우씨도 역자주를 통해 이를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이어지는 ‘조잡하고’ ‘덜 된’이란 번역은 너무 나갔다. raw는 ‘조잡한’이 아니라 ‘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무엇”이란 의미이지, 조잡한 무엇의 의미는 아니다. 생선회(raw fish food)는 조잡한 음식이 아니다. 이렇듯, 이 책의 역자 이홍우씨는 자의적인 의역이 너무 심하며, 또 자신의 지적 역량을 과신해서 때론 원저자인 듀이 선생의 오류를 꼬집기도 하는데, 그게 얼마나 황당한 독선인지 나중에 한 예를 들어 보겠다.

이 책은 반드시 원서와 대조해가며 읽어야 한다.

 

 

좌우지간 듀이가 이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양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관심이나 문화적 수준을 벗어나” 정교한 소양을 지닌 소수 애호가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시하는 개념이 ‘사회적 효율성 social efficiency’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듀이 선생은 결코 우리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주역 레닌을 우리와 동시대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듀이의 이 책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16년에 쓰였다.
듀이가 우리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함의한다. 첫째는 그 시대의 교육사상가가 오늘날 상황에서도 유효하고 시의적절하기까지 한 담론을 펼치는 것이 놀랍다. 둘째,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미국) 교육상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학교가 인간이 지녀야할 고급스런 소양으로서의 ‘culture’의 계발을 보편적인 교육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듀이의 생각은 당시로선 꽤나 급진적인 발상이었다. 교양이란 소수의 잘 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듀이는 이 같은 통념을 혁파하기 위해 “개인의 교양 발달이라는 고귀한 목적이 사회적 효율성에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봉건사회의 유물”이라고 강변한다(22).

 


봉건사회의 엘리트들이 교양을 중요한 인간 자질로 생각했던 것은 그것이 ‘희소가치’를 표방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세종 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만들어 만백성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했지만, 그의 신하들을 비롯하여 양반집단이 극도의 반감으로 품었던 것도 그런 심보였다. 교양은 소수의 엘리트들의 몫인데, 천한 상것들이 문자를 익혀 자기네들과 대등한 수준이 되면 세상말세라는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유럽에서 발흥한 베리스모 오페라도 그렇다. 귀족들의 애정행각이 아닌 천한 서민들의 삶을 소재로 삼으며, 상것들이 감히 객석에 앉아 오페라를 관람하게 된 것이 귀족들로서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목적은 경험의 과정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23-1)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듀이 특유의 이런 문체들이 이 책의 독해를 어렵게 한다. 그럴 때는 이 글 서두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이란 프레임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게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 말미에서 언급할 것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김씨조선사회(북조선인민공화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인데, 교양 교육에 관한 존 듀이의 난해한 말들이 이 구호와 일맥상통한다. ‘사회적 효율성’이란 공공의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적 차원(=전체)인 반면, 경험은 개인적 차원이다. 이 상반되는 두 계기(헤겔의 개념으로 Moment)가 변증법적 통일을 이룰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교육의 목적이 교수-학습 차원의 교육실천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별로 어렵거나 심오한 명제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실현’의 원리가 그러한데, 예컨대 음악에 심취하는 활동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활동을 통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교육시스템은 모든 아이들에게 이러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있게끔 교육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 구현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떼마’가 그 좋은 예가 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서 개별 학생의 심미적 활동이 공동선과 연결되는 경우는 잘 없다. 학교교육의 차원에서도 그러할뿐더러 개인적 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사회에서 교양교육은 개인의 스펙 쌓기나 허세 부리기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사회적 효율성이 ‘활동’의 의미나 정신과는 무관하게, 좁은 범위의 ‘행위’와 동일하다면, 교양은 또한 ‘사회적 효율성’에 반대된다.(21-5)

 

어제까지만 해도 ‘활동(activity)’과 ‘행위(action)’가 뭐가 다른지 몰랐는데, 이젠 명확해졌다. 활동은 사회적 차원, 행위는 개인적 차원과 연결된다. 이를테면 전자는 학교음악시간에 합주를 뜻하고 후자는 음악교습소에서 바이올린 배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활동의 정신’이란 방금 내가 언급한 ‘공동선’과 관계있다.

 

효율성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외적 산물에 의하여 규정될 뿐, 특이하게 가치로운 경험을 이룩하는 데에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물질주의가 된다.”(23-2)

 

사회적 맥락과 유리된 개인적 차원의 교양 단련 행위를 존 듀이는 ‘물질주의’라 규정하였다. (이 표현에 이홍우씨는 친절하게도 역주를 다는데, materialism이라 적고 그 옆에 ‘유물론적’이란 말을 병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관념론에 대비되는 유물론이란 의미는 전혀 없다. 80년대 마돈나가 부른 <Material Girl>은 ‘돈만 밝히는 여자’란 뜻이지 ‘유물론적으로 사고하는 여자’란 뜻은 아니다.) 듀이 선생이 마르크스를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가 비호감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맥락에선 materialism이란 말보다 물신(fetishism)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공동선과 유리된 순수한 개인적 차원의 교양은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자신의 본래성(authenticity)로부터 멀어지는(alienated) “소외(alienation)”를 낳는다. 우리 주위에 음대/미대 교수들 가운데 이런 사람 많이 볼 수 있다.

 

이 문단의 마지막에 멋진 말이 나온다.

 

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가 자유로운 상호작용 속에서 다른 사람과 어떤 협동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물자를 공급한다는 뜻에서의 효율성과 혼자만의 정신적 세련으로서의 교양을 모두 초월한다.

 

첫 번째 문장은 영어로 “What one is as a person is what one is as associated with others.”인데, 역자의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어 있다. 하지만, 덜 매끄럽더라도 원문에 충실해서 다음과 같이 옮기면 그 훌륭한 의미가 더 잘 전달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이웃과의 관계맺음에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우리가 있음에 내가 있다”)를 연상케 하는 이 멋진 말에서 듀이 사상에 호감을 품게 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물자를 공급한다”는 번역은 영 이상하다. 물자에 해당하는 원어는 ‘product’인데, ‘생산품’이란 뜻이다. 듀이가 ‘product’라 한 것은 경제학 용어로 ‘효용’이란 의미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 모두를 초월한다(transcend)”란 것은 “그 둘을 아우르는 의미 이상의 무엇”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우리가 있음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악기를 잘 연주할 수 있어서, 예컨대 재능기부를 통해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의 영혼도 고양되고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24단락에서 듀이는 특유의 변증법적 논리를 내세워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효율성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에 자기 자신을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혼자만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것인가의 양자 중에서 어느 한 쪽만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24-2).

 

이 훌륭한 문장은 듀이 변증법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게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대개 변증법하면 정-반-합의 3박자를 떠올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품는다. 그러나 변증법은 ‘정반합’과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상적 의미로 ‘동전의 양면’이나 ‘양날의 칼’이란 표현이 변증법의 의미를 잘 표현해 준다. A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A가 아닌 것, A와 대척지점에 있는 무엇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인식론적 방법이 유용할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이해는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아닌 것, 변증법과 대척 지점에 있는 사고 체계가 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리스 콘포스(Conforth, M.)가 ‘형이상학적 양자택일’이라 일컬은 것으로서 듀이의 이 문단(24)에서 ‘이원론(dualism)’이라 한 것이다. 간단히, 변증법이란 “서로 대립되는 두 계기(범주쌍)를 따로 따로 생각하거나 양자택일로 생각하지 않고 통합적 개념으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이론과 실천, 내용과 형식, 이성과 감성, 현상과 본질 등등의 범주쌍에서 서로 대립되는 계기(moment)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흥미 interest’와 ‘노력 effort’을 서로 대립적인 속성으로 봄으로써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이 나라의 학생과 학부모, 심지어 학교 교사들도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듀이에게 ‘흥미와 노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학생의 흥미가 뒷받침 되지 않는 학습,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에 전혀 흥미를 못 느낄 때 우리는 학생의 노력을 탓한다. 존 듀이의 교육사상은 한마디로 “교육에 관한 이런 사고(=비변증법적인 사고)를 배격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교육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성장함에 있어 개인의 발전과 사회적 효율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의 특별한 재능은 이웃을 위해 쓰일 때 최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쓰임’을 ‘희생’으로 생각하여 고귀한 성직자의 몫으로 돌려 버린다. 듀이는 말한다.

 

소위 영혼을 추구한다고 하는 세계의 종교사상이 대부분 자기희생과 자기영혼의 완성이라는 두 가지 이상을 강조하면서 이 삶의 이원론적 이상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비극이다(24-4).

 

신약성경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듀이는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배격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설령 버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 버림은 더 많은 얻음을 기약하기에 하등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게 궤변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교사들의 간단한 일상사를 통해서도 검증된다.

 


우리 교사들은 성직자는 아니지만, 별 특별한 갈등 없이 ‘자기희생’의 길을 선택한다. 이를테면, 4학년이 되도록 책을 못 읽거나 구구단을 모르는 아이를 맞닥뜨릴 때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지만, 교육자적 양심에 그 아이를 책임지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나 나의 소박한 헌신적 노력으로 아이가 조금씩 변화해 갈 때 우리는 큰 보람과 희열을 얻는다. ‘주는 것(giving)’이 곧 ‘받는 것(taking)’인 것이다. 그 전형은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인데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젖가슴에 묻혀 행복해하는 아기를 보고 ‘희생당한다’는 느낌을 갖는 모성이 없듯이, 교사가 약간의 능력과 수고를 발휘해 아이들이 기뻐하고 또 행복한 기운이 온 교실에 충만해질 때, 그 교육애는 곧 자기 행복의 원천인 것이다.


특별한 교양을 소유하여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펼치는 ‘재능기부’는 결코 헌신이나 희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축복이다. 개인의 교양적 성장과 사회적 효율성은 양립할 수 있고 또 양립할 때만이 인간다운 삶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