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표절에 관하여

리틀윙 2015. 9. 2. 08:34

요즘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작가의 표절문제에 관한 내 생각을 적어본다.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달리 평가해야겠지만, 나는 표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한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걸로 논리를 전개해보겠다.

 

나도 최근 한 권의 책을 낸 작가다. 책을 내고서 지인들에게 책을 돌리는 과정에서 내가 속한 연구소(사람대사람)를 찾았다. 동료들에게 책을 한 권씩 돌리고선 오랜 만에 만난 회포를 나누기 위해 소박한 술자리까지 뻗치게 되었다. 그 날 술자리에선 내가 주인공이었던 관계로 내 책에 대한 화제가 주를 이루었다. 내 교대 동기 조** 박사가 연신 찬사를 늘어놓는데, 같이 자리했던 우리 은사님 김민남(전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선생님과 나를 동시에 치켜세울 뜻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책을 대충 읽어 보니 친구의 글이 너무 좋은데, 곰곰이 뜯어보면 김민남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다. ‘교육과 삶이라는 화두도 그렇고...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동료가 맞장구치며, 자신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내 책의 목차만 슬쩍 봤는데, 그 가운데 아웃사이더에게 무대를이란 제목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는 거다.

 

 

 

 

물론, 이 분들은 나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는 덕담을 공유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이것은 표절의 문제가 아니다. 이 분들이 이 맥락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결벽적인 내 성격상 그에 관한 내 입장을 해명하자면......

두 표현 모두 은사님의 아이디어에서 따온 것은 맞다. 하지만, 제목이 그러할 뿐 내용을 따온 것은 없다. 특히 삶과 교육은 사진에서 보듯 김민남 선생님의 표현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이 화두를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존 듀이의 변증법으로부터 말미암은 바가 크다. 존 듀이를 전공하신 김민남 선생님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의 은사님이 듀이를 표절하지 않았듯이 나 또한 은사님을 베낀 것은 아닌 것이다.

 

나의 경우는 누가 봐도 표절이라기보다 영향 받음으로 해석할 것이다.

, 여기서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작가의 표절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Nihil sub sole novum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마르크스의 혁명론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부르주아지의 역설적 관계는 헤겔의 주인-노예의 변증법을 카피한 것이고 이 둘의 사상 모두를 카피한 것이 프레이리의 피억압자의 교육학이다. 그 밖에도 프레이리의 유명한 개념들은 사르트르나 카렐 코직 등의 사상가들을 카피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표절 도둑으로 몰지 않는다.

 

어떠한 thinker도 앞선 thinker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은사님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 그 분의 아이디어를 베끼진 않았다. 내가 그 분의 아이디어를 (전문 용어로) 패러프레이징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상의 저장고 속에 (비고츠키의 용어로)접혀 있던(folded) 것을 펼쳐낸 것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나오는 흥미있는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겠다.

고딩 때부터 영화에 미쳐 웬만한 영화평론가 이상의 수준에 있던 두 친구 병석(최민수)과 명길(독고영재)은 어른이 돼서 영화인의 길을 간다. 명길은 충무로에서 무명 감독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소식이 끊겨 있던 병석이 어느 날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명길 앞에 나타난다. 명길이 제작한 그 영화는 대박이 났는데, 명길은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 속에서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깊은 분석에 들어간다. 그런데 영화의 미장센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네가 고딩 때 열광했던 헐리우드 영화의 씬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이에 명길이 병석을 몰아 부치면서 패러디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데, 문제는 병석 자신도 그게 패러디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병석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나도 헐리우드 키드한테 속았어!

 

어린 시절 병석의 삶은 헐리우드 영화가 전부였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의 심연 깊숙한 곳에 헐리우드 영화가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창작정신을 발휘하려고 해도 그 굴레를 못 벗어났던 것이다.

 

지금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표절문제도 이런 것이 아닌지 모른다.

물론 사악한 표절도 많다. 청문회에서 문제가 되는 대학교수들의 논문들이 그러하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표절과 관련한 시시비비를 가림에 있어 다소 관용적인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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