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인의 영화 이야기

영화 [땡큐, 마스터 킴] 감상평

리틀윙 2015. 8. 8. 11:49

충격과 혼란 

[땡큐, 마스터 킴], 이 영화에 대한 소감을 한두 낱말로 표현하면, ‘충격과 혼란이라 하겠다. 음악과 예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이토록 깊이 파고 들어간 지적 산물이 또 있을까 싶지 않다. 이 영화는 2009년 더번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제에서 입상하였고 평론가들로부터도 많은 찬사를 받았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는 이 영화에 대해 정말 심오하고 감동적인 영화라며 극찬을 보냈다.

이 영화는 호주의 재즈 드러머 사이먼 바커(Simon Barker, 이하 사이먼)가 우연히 한국의 무속 음악가 김석출 선생의 연주를 듣고서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여정을 그린 로드 다큐멘터리다. 사이먼은 김석출 선생을 만나기까지 7년에 걸쳐 총 17차례나 한국을 방문했지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스터 킴이 너무 위대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자신이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그의 신상이 조회되지 않았던 것이다. 호주의 유명 재즈 뮤지션이 아는 한국의 음악 관계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가 사는 곳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 그저 무형문화재 82로 불리는 김석출 선생이 한국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런 것이었다. 사이먼에겐 이게 너무 기이한 수수께끼였다. 위대한 음악 재즈의 생명은 즉흥연주에 있는데, 자신이 보기에 마스터 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즉흥 연주자였다. 이 위대한 마스터의 연주를 기록한 악보는커녕 CD 한 장도 레코딩 된 바가 없다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받은 충격과 혼란의 핵심도 이것이다. 호주의 뮤지션에게 수수께끼인 무엇이 우리 한국인들에겐 충격인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Master Kim’으로 상징되는 한국 전통 음악의 가치가 고양되면 고양될수록, 그 충격은 곧 심각한 부끄러움으로 바뀐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한국인임에 긍지를 갖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한없는 수치의 늪에 빠뜨린다. 한국인으로서 이 영화를 읽어가자면 극단의 자긍심과 극단의 수치심을 왔다 갔다 하는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리셋

충격에 따른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지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기존 사고에 대한 리셋이 요구된다. 어떤 부분은 컴퓨터를 초기화하듯이 관점 자체를 송두리째 개조해야 하고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선 그간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어떤 가치에 대한 재설정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논하기 앞서, 이 영화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해 먼저 짚고자 한다. 이 영화를 본 뒤 그 감격을 전하기 위해 내가 아는 한 재즈 뮤지션(공교롭게도 이 분이 예전에 사이먼과 함께 연주활동을 하셨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내게 묻기를, “한국 영화냐 외국 영화냐?” 하는 것이었다. 일순간 나는 멈칫했다. 둘 가운데 무엇을 답으로 선택할 지 헷갈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콘텐츠는 한국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빚은 사람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의 대상은 한국인과 한국의 전통음악이고 인식의 주체는 외국인인 것이다.

단언컨대,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한없는 감흥과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외래의 인식론에 말미암은 바가 절대적이다. 숲 속에 있는 사람이 숲을 볼 수 없듯이 우리 예술의 가치를 우리는 모른다. 숲이 주는 맑은 공기의 가치나 정중동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것을, 문화적으로 메마른 낯선 땅에서 온 방문객의 시선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사이먼 가라사대, “이 오랜 역사 속에서 풍부한 문화를 키워온 한국이 부럽기만 하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우리 것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음악과 예술현상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연출자나 나레이터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무릇, 예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인식 능력이 요구되는 인간행위이다. 철학적 역량의 안받침에 비례해서 예술적 역량이 발전하는 것이다. 니체가 모든 철학자는 음악가가 되어야 하고 거꾸로 모든 음악가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런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선 철학적 역량을 갖춘 음악가를 극히 보기 드문 실정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 예술의 숨은 가치가 외국인에 의해 발굴되어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재즈 보컬리스트이기도 한 이 영화의 감독 에마 프란즈(Emma Franz)는 음악 동료 사이먼이 자신의 음악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마스터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과정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의 본질적 측면을 꿰뚫는 이들의 비범한 시선과 놀라운 통찰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 전통음악이나 음악 일반에 대해 품어온 가치판단에 대한 리셋을 요청한다.

 

뮤지션으로 살아간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내가 뭘 하고 있고 왜 이걸 해야 하는가?

 

위와 같은 질문으로 이 영화는 말문을 연다. 이 심오한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뮤지션으로서 정체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사이먼의 지론이다. 사이먼의 진지한 성찰은 에릭 프롬의 화두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를 떠올리게 한다. 현대인들은 존재적 삶 대신 소유적 삶을 쫓는 까닭에 자신의 본래성으로부터 멀어져가는데, 프롬은 이 같은 기제에 대해 소외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소외된 삶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기다운 삶을 쫓기 위해선 뮤지션으로서 혹은 교사로서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하는 고민을 끝까지 품어야 할 것이다.

소외된 삶의 특징은 내면보다는 외면에 충실하고자 하는 점이다.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내면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이나 지적 소양을 단련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스펙 쌓기나 재물 축적에만 신경을 쓴다. 뮤지션의 경우도 그렇다. 음악적 내공보다는 무슨 명문 과정을 밟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또 현실적으로도 그러한 스펙이 음악적 능력으로 통하기도 한다. 뮤지션의 스펙은 마르크스가 말한 등가물을 구성하여, 유학파의 레슨비는 얼마, 대회 입상자는 얼마 하는 식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말대로, 소유의 삶을 쫓을수록 소외의 부분도 그만큼 커져가서 뮤지션의 영혼은 망가져 간다.

음악의 본질보다 자본의 논리를 쫓는 자세도 문제지만, 음악 내공 증진에 있어 외적인 면만 추구할 뿐 내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이나 통찰이 결여된 것도 소외의 한 단면으로 봐야 한다. 사이먼 가라사대,

 

한때 나는 빠른 속도로 연주하고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했다. 하지만 거기엔 뭔가 부족한 게 있었다...... 그 뒤 한국에 와서 몸 쓰는 법을 배우고선 나의 사운드가 훨씬 풍부해졌다. 플레이는 줄이면서도 나의 감정이나 정서를 더 많이 싣는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주자에게 파워와 스피드가 어느 정도 중요한 건 사실이다. 문제는 그걸 절대시하고 그게 전부인 줄 아는 마음가짐이다. 물론 나는 전문 음악가가 아니기에 음악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할 위치에 있진 않다. 하지만 내 주변엔 음악 하는 분들이 많은 편이다. 그 분들 가운데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분들은 예외 없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는 관점을 갖는 것을 봐왔다. 그러한 각성은 뮤지션이 겪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성장통이라 하겠다. 나아가 사이먼은 진정 대가다운 발상을 전하는데, 삶과 음악, 뮤지션과 악기가 하나 되는 경지에 관해 논한다.

 

이 분들의 연주에는 고요한 힘이 느껴진다. 저마다 강한 음악적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더 큰 그림을 생각해낸다. 그렇게 음악에 자신을 내맡길 때 더 즐기게 되는 거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음악적 고민들이 풀렸다. 악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좀 더 분명한 느낌이 생겼고, 연주할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느긋해졌다. 더 나은 음악인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내가 얻으려는 무형의(intangible) 음악적 요소들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사이먼이 이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한국 전통음악이 위대한 이유가 삶과 음악이 하나 되는 점이 아닐까 싶다. 위의 인용문에서 음악에 자신을 맡긴다.”하는 부분에서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음악 애호가로서 글쓴이가 이 영화에서 얻은 가장 값진 가르침, 사이먼 바커라는 비범한 뮤지션의 음악 철학에서 가장 크게 공감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뮤지션에게 음악과 삶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삶의 희노애락이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고 반대로 치열한 음악적 실천으로 그의 삶은 더욱 풍부해진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면(작곡)에서나 음악을 표현하는 면(연주)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음악을 표현하는 도구인 악기와 뮤지션의 몸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이먼은 악기를 쓰는 법이 아니라 악기를 대하는 법에 관해 논한다. 드럼이나 드럼 스틱은 연주자와 별도로 존재하는 물체가 아니라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부분이어야 한다. 그리고 악기를 매개로 몸이 음악을 표현하는 이치는 삶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이 원리를 깨달을 때 최선의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음악적 정체기를 맞아 방황하던 사이먼이 찾은 답이었다.

뮤지션이든 운동선수든 몸을 써서 자기 역량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난제가 힘 빼기일진대, 이와 관련하여 국악인 강선일 씨가 사이먼에게 전수한 방법이 흥미롭다. 이른바 아이고 연습법인데,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바닥을 치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맞았을 때 우리 신체에 있는 모든 인위적 경계심이나 긴장을 해제하고서 원초적인 감정만을 남겨두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이먼은 이 방법을 터득하고 나서 연주할 때 힘을 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이먼도 언급하듯이 서양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감정을 쏟아내는 법이 없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쓴다. 같은 동양권인 일본인들의 경우도 슬픔을 속으로 삭일 뿐 우리처럼 야단법석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정치지도자의 자제분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일러 미개한 국민정서운운 한 것인데...... 재즈 드럼의 대가인 파란 눈의 이방인이 필생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이 미개한 국민정서에 바탕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우리 민족의 삶의 자세로부터 악기 연주의 원리를 깨달아가는 이방인의 태도는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인간 삶에서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태는 없다. 자신의 것이든 가까운 사람의 것이든 죽음 앞에서 인간은 가장 진솔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죽음을 매개로 음악을 표현하는 무속음악이야 말로 가장 원초적이고도 가장 인간적인 예술행위일 것이다. 재즈 드러머 사이먼 바커가 김석출 선생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뮤지션으로 일컬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표현 양식이 미개한 국민정서로 치부되듯이, 무속음악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그러했다. 서양 뮤지션들이 최고로 치는 무엇이 우리 한국인들에겐 가장 재수 없는 짓거리로 외면 받아온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한 한국인의 집단적 자기반성에서 이루어져야 할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리셋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것은 역설이라는 키워드로 따로 논하고 싶다.

 

 

역설

사이먼이 마스터 킴을 알게 된 것은 자신에게 드럼을 배우러 온 한국인 유학생을 통해서였다. 학생은 김석출 선생의 장구 연주를 들려주면서 형편없는 연주라 했지만, 사이먼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최고의 연주였다. 드럼 연주에 관해 내가 찾고자 한 모든 것, 리듬이나 에너지 등이 여기 다 들어 있었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쳐서라도 이분의 삶과 이분의 음악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사이먼이 들은 음악은 북, 장구, 꽹과리, 태평소와 노래가 어우러진 연주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국악 한마당이다. 거기에 그토록 깊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이먼의 비평에 대한 판단은 우리 같은 범인의 몫이 아닌 듯싶다. 어쨌건 높은 경지에 있는 뮤지션의 관점인 만큼 정통한 시각일 것은 분명하다. 한국인들이 하찮게 여기는 우리 음악이 서구인들로부터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 더구나 그 음악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천하디 천한 민초의 것이었다. 인간 김석출은 찢어지게 어려웠던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바로 무속인의 길을 걸으며 사회적 멸시와 조롱 속에서 불우하게 성장했다. 가장 천한 것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탄생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예술적 경지가 형성되고, 가장 못 배운 사람에게 최고 수준의 서구 음악 지성이 배움을 구하러 오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심장인 수도 서울은 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메트로폴리스이다. 이곳엔 없는 게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된 지하철 시스템이나 우뚝 쏟은 마천루는 한국 경제력의 상징이다. 거리엔 예쁜 아가씨들로 넘쳐나고 맛있는 음식점과 첨단 유흥시설 등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넘쳐 나는 서울에 딱 하나 없는 게 있다. 이곳엔 '우리 것'이 없다.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은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거나 난중일기를 쓰며 고뇌하는 모습과 거리가 먼 흡사 거만한 맥아더 장군 같은 느낌이며, 남대문은 더 이상 남대문이 아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고궁에서도 우리 것을 찾기 힘들다. 한줌 귀족들의 흔적은 몰라도 수많은 외침과 환란 속에서도 우리 역사를 지켜온 질긴 절대다수 민초들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차라리 우리 것은 저 낮은 곳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있는 무속신앙 속에 있다. 외래의 재즈 뮤지션이 정확히 포착했듯이, 인간 김석출의 삶과 음악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심볼이다. 가난과 천대로 점철된 그의 삶 속에 이 나라 질곡의 현대사가, 그 설움을 음지에서 토해낸 그의 음악 속에 우리 시대 민중의 고통과 애환이 담겨 있다. 인간 김석출의 삶과 음악 속에 한()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혼의 고갱이가 녹아 있었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승화된 결정체가 영화 [Intangible Asset No. 82]였다.

 

그의 호적 산조에는 시나위나 대취타 가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자라 온 그의 어린 시절과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 온 그의 삶의 역정에서 마음 깊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산조 가락을 갈고 닦아 마지막 남은 삶을 날라리 산조로 마무리하고 2005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 김명곤(전 문화관광부 장관, 영화 서편제의 주연배우)

 

 

 

 

무형 문화재

이 영화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음악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필름에 담은 것이다. , 외국인이 만든 영화이다. 책이든 영화든 제목 속엔 작품 생산자의 메시지가 농축되어 있는 만큼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Intangible Asset No. 82]인데, 그대로 옮기면 무형문화재 82가 된다. 김석출 선생을 지칭하는 말로 이렇게 옮긴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무형문화재 82호에 해당하는 것은 동해안 별신굿인데, 김석출 선생은 그 기능을 보유하신 분일뿐이다. 정확히 말해 김석출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82호 기능 보유자이시다.

이런 점을 알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제목을 그렇게 뽑았을 수도 있다. ‘무형 intangible’이라는 의미가 주는 동양적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한 뜻에서 말이다. 첼리스트 요요마의 평론에 그러한 의미가 잘 함축되어 있다.

 

무형문화재 82는 심오한 지식과 정서적 공감이 씨줄과 날줄로 만날 때 진정한 예술이 만들어지며 그 속에서 인간 의식과 자연은 하나가 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형 자산들(tangible assets)의 가치만을 쫓는 세태에 무형문화재 82는 예술과 삶이 하나 되는 변화의 과정을 쫓으며 마침내 성취해낸 한 뮤지션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참으로 심오하고 감동적인 영화다.

“Intangible Asset No. 82shows us that art occurs at the intersection of deep knowledge and compassion, where human self-knowledge is at one with the natural world. In a world where tangible assets are constantly being measured and compared, “Intangible Asset No. 82gives the viewer a visible demonstration of a musician seeking and achieving transformative oneness. It is indeed a profound and moving film.”

 

그러나 심오하고 감동적인 것은 이 영화이고 그 원천은 김석출의 삶과 음악일 뿐, 한국 전통문화라는 무형의 자산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요요마나 감독의 관점과 무관하게, 무형문화재야말로 가장 소외된 형태의 유형물이다. 박물관 쇼윈도 속에 전시된 유물처럼, 생명력을 잃고서 대중의 삶 속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 무형문화재는 박제된 예술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훌륭한 조상의 문화유산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선 심오한 지식과 정서적 공감의 통합이 요청된다. 우리 음악 관계자들이 사이먼과 에마 그리고 요요마가 지닌 지적 소양의 10분지1만큼이라도 지니면 좋을 것이다.

 

 

 

 

다리

이 영화에는 다리라는 화두가 자주 등장한다. 도입부에서 사이먼 가라사대, “무속인 김석출의 음악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다리다.” 잠시 뒤엔 사이먼과 영화 스탭들에게 한국의 음악세계를 소개하는 국악인 김동원 교수가 또 멋진 말을 남긴다.

 

전 제자들에게 말해요.

나는 다리다. 내 등과 내 머리를 밟고 올라가라. 그래서 나보다 더 멀리 가라. 나는 너희들을 위한 사다리가 될테니, 내 등과 내 머리를 밟고 올라가라. 그게 스승의 의무고 또 스승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제자의 의무다. 나는 튼튼한 다리가 되고 싶으니 나를 밟고 올라가라. 내 등과 머리를 밟고 올라가 다음 세대를 위한, 너의 제자들을 위한 다른 다리가 돼라.”고요.

 

17차례나 한국을 방문하고서도 김석출 선생을 만나지 못한 사이먼에게 사실 김동원 교수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사이먼과 마스터 킴을 잇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야말로 한국 음악과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뜻깊은 다리 역할을 했다. 실로 한국인들보다 한국 문화와 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그 가치를 높이 사는 이들의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지만, 이들의 헌신과 노력에 얽힌 뒷이야기들은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마저 불러일으킨다. 사이먼이 김석출 선생을 향한 불굴의 의지도 놀랍지만, 이 영화를 만든 에마 프란즈의 눈물겨운 헌신과 열정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예술성과 대중성은 양립할 수 없는지라,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에서 화려한 수상경력이 무색하게도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에마는 파산했다. 한때 그녀는 이로 인한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는 소식이 검색된다. 이 영화는 2010년 한국에서 맨 처음 개봉되었는데, 한국인들만 영화를 많이 봐줬어도 파산까지는 안 갔을텐데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늦으나마 에마를 돕고자 하는 작은 마음에서라도 영화 '땡큐, 마스터 킴"의 DVD를 구입하면 좋을 일이다.

미안해요, 에마. 땡큐, 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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