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인의 영화 이야기

국제시장 평론

리틀윙 2015. 1. 6. 20:02

 

 

 

<국제시장>을 봤다.

세간에 이 영화를 놓고 논란이 일길래 한 번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베리 굿이다. 작품성이란 차원에서 그리 훌륭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허접한 영화도 아니다. 미리 말하지만, 애국가 씬을 놓고 이 영화를 씹어대는 갑론을박이야말로 허접한 평론일 뿐이다. 그 시절 국기하강 할 때 부부싸움 중인 사람도 동작그만 하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상식이었다. 오늘날 부부싸움 중인 사람이 할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함께 엎드려 절 하는 것이 우스꽝스럽지 않다면 그 시절 그 모습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사회의 특징을 한 낱말로 규정하라면 나는 분열혹은 대립을 들겠다. 2014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것도 이런 뜻이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이 땅의 분단의 역사가 70돌을 맞는다. 분단이 오래도록 고착화되면서 남과 북 모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기형적인 모습의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기형적인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분열시킨다.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개인을 정신분열로 이끈다. 남과 북 모두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이 땅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남한은 또 지역 간에 세대 간에 그리고 좌와 우의 이념, 진보와 보수의 지향성으로 서로 대립하고 분열해가고 있다. 치유가 필요한 사회다. 이 사회적 열병의 원인이 분열에 있는 만큼 그 치유는 화합을 지향해야 한다. 화합이 말처럼 쉽지 않음은 물론이다. 어떠한 화합도 나눔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눔이 있다고 해서 화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부싸움이 꼭 돈 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물질적 부분 외에 인식론적 요소, 심리적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 화합 이전에 화해가 있어야 하고 화해는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이해를 돕는 유용한 도구로 쓰일 것이라 호평하고 싶다. 이 조잡한 평론 또한 화합 또는 이해에 포커스를 두고 전개할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집에 와서 알았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한국전쟁과 피난민의 애환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랫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여기서 금순이 대신 막순이를 넣으면 딱 이 영화의 줄거리와 일치한다.

 

노래 2절에서는 국제시장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그리고, “금순아 굳세어라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3절 노랫말처럼 이 영화에는 우리의 소원 통일의지가 묻어 있다결코 초중등 도덕교과서 식의 계도용이 아닌 미학적 카타르시스와 연결된 나름 정교한 장치로 연출되고 있다.

이 영화평을 쓰기 위해 거꾸로 이 훌륭한 노래의 가사를 다시 뜯어보게 되는데, 당시 이승만 정권기에 6.25를 배경으로 한 노래치곤 굉장히 '진보적'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여 잘 자라]에서처럼 비장하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한 극단적 반공주의가 독재정권기에 한국전쟁과 북한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정서였다. 1958년 이승만이, 단지 멸공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처형했음을 생각해보라.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북한에 대한 어떠한 악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오히려 남북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염원하니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불온한(?) 따라서 진보적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정치적 포지션도 이와 유사하다.

 

사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무엇이 이데올로기 논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 논쟁이라는 것이 누구든 입을 떼는 순간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 한 편에 서게 되어 있지 중립적 입장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예가 한국전쟁의 발발에 관한 이슈이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오판으로 야기된 민족 최대의 비극이자 세계전사에서도 유래가 드문 대재앙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통진당 친구들은 네가 진보냐?”고 일갈해올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 “6.25란 것이 남한 사람들이 잠자는 일요일 새벽에 그 평화로운 국민의 의표를 찔러 북한 공산군이 갑자기 도발해온 것은 아니다. 이승만도 툭 하면 북침의지를 천명했다.”고 말하면 이번엔 또 자유운운하는 단체에선 나더러 빨갱이 선생이라 매도할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리라.

이 영화가 그러하다. , 6.25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이 영화는 현명하게도 전쟁을 카메라에 담지 않음으로써 소모적인 논란거리를 피해간다. 아니, 정확히 말해 전쟁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피해간다. 이 영화의 배경으로 흥남철수 씬은 도입부에서 비중 있게 그려진다. 향후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도 이 장면은 피할 수 없다. 영화 초반에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박진감 있게 묘사한다. 미군 군함을 개미떼같이 오르는 민초들의 처절한 몸짓과 살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얼굴 표정이 전쟁의 참상을 조건반사적으로(몽타주 기법)’ 대변해 준다. 일부는 밧줄을 놓쳐 바다에 빠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그 차가운 바닷물에 시체가 둥둥 떠다닌다. 우리의 주인공 덕수의 여동생도 그렇게 떨어져 가고, 이어서 덕수의 아버지도 배에서 내려 딸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가족은 눈앞에서 생이별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로 여동생과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 책망은 주인공에게 한평생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고, 헤어지기 직전 아버지가 덕수에게 한 말, “니가 이제부터 가장이다. 가장이란 어떤 식으로든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다.”는 화두를 필생의 정언명령으로 품는다. 그리고 이 말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6.25 관련 장면은 이게 전부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은 한국전쟁을 다루면서 불가피하다 싶은 민감한 이슈를 현명하게 피해갔다. 선량한 피난민들이 북한군이 아닌 중공군을 피해 달아나는 걸로 묘사함으로써 국론분열의 불편을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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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교적 가벼운 양념성 코드는 지역 갈등의 극복이다. 이 영화 속에는 한국 현대사와 문화사를 대변하는 몇몇 실존인물들이 마치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데, 정주영-앙드레김-남진의 순으로 나타난다.(이런 창의적인 연출기법이 자칫 눈물바다를 이루며 무겁고 침울해질 수 있는 이 영화의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주고 깜찍한 흥미를 더해준다.) 이 중 남진의 출연은 뜻밖이다. 감독의 의중을 모르지만 내가 볼 때 이 양반은 동서화합을 위한 촉매제로 등장시켰지 않나 싶다.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와 그의 아내 영자(김윤진 분)가 나훈아와 남진 가운데 누가 더 좋으냐를 놓고 옥신각신 하는데이 두 인기 가수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으로 두 라이벌 인기스타의 대립은 당대 영호남간 지역감정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사실 김대중이 대통령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지역감정은 정말 심했다. 그런 시대에 경상도 남자인 덕수가 나훈아보다 남진을 더 선호하는 자체는 억지스러운 시츄에이션이다. 그러나 덕수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전에서 남진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이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남진은 실제로 베트남에 해병으로 참전한 적이 있다.) 어쨌건 설령 그게 억지일지언정, 경상도 남자가 경상도 가수보다 전라도 출신 가수를 더 좋다고 우기는 장면은 참 보기 좋았다. 이 감동은 아마 경상도인이 아니면 그리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진이 우리의 주인공을 구하는 그 장면 설정은... 내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유감을 품는 대목으로서 감독의 역사인식의 한계를 느꼈던 부분이다. 중화기로 무장한 베트콩들의 눈을 피해 주인공 일행이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는 장면, 대한의 남자들 덕수와 그의 절친 달구(오달수 분)는 비전투요원으로 파병하였다 은 온순한 약자로 그리는 반면 베트콩들은 사납고 불량스럽게 그리는 시추에이션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선량한 베트남 민초들이 베트콩에게 발각되면 몰살되니 단지 한국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 자신들을 데리고 가달라는 상황설정은 완전한 사기다.

좋은 영화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핍진성(verisimilitude)’이란 것이 있다.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쉽다. 라틴어로 ‘veri-’진실’, ‘simil-’비슷한이란 뜻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있음직한 거짓말이어야 한다. 이것이 핍진성이다. 따이한 군대가 베트콩이나 베트남 인민들에게 저지른 잔혹성이나 베트콩들이 베트남 인민들을 품는 헌신성을 생각할 때, 영화의 이 장면은 전혀 있음직하지않은 상황설정이다.

마찬가지로, 흥남철수 장면에서 미 해군중장이 처음엔 피난민을 태우려 하지 않았는데 한국군 장교의 간절한 애원 - 당시의 한국인 치곤 영어발음이 너무 정확하다. - 에 마음을 바꿔 피난민을 수용한다. 여기까진 좋은데, 군함에 적재된 무기를 다 버리고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실으라는 하해와도 같은 선처는 코미디를 방불케 한다. 한국전쟁에서 남한 백성보다 북한 백성들이 훨씬 많이 죽었고 북측의 피해 가운데 대부분은 미군에 의한 융단폭격과 학살로 이루어졌다. 황해도 신천군 양민학살 사건은 나중에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당시 미군의 만행은 심했다. 그런 미군이 배에 실은 무기까지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우는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있음직함과 거리가 멀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이 부분에 대한 은근한 반론을 남기셨다. 흥남철수 때 미군 책임자가 피난민을 실기 위해 배에 적재한 무기를 버린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관계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랍다.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신 분께 감사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장면 설정은 핍진성(verisimilitude)’이란 차원에서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남는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작품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서 ‘verisimilitude’는 사실(veri-)과 유사할(simil-) 것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사실 그 자체보다 사실에 가까운 개연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게 리얼리즘의 핵심 개념이다. 다시 말해, ‘사실 그 자체사실성(현실성, reality)’을 농락하는 것이 거짓 문화예술상품들의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이 그런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감독의 실수라기 보다는 실력으로 보인다. , 역사인식의 한계.

예술작품의 리얼리즘이란, 인물의 캐릭터를 배치할 때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의 친일 순사로 따뜻한 심성을 가진 인물을 내세운다면 어떨까? 사실관계란 차원에서 그런 인물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일 뿐 그 인물이 친일 순사의 성격(캐릭터)를 보편적으로 대변할 순 없다. 개별적인 사실성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사실성 속에서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전자를 내세우면서 후자를 덮으려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기와 위선을 구성하게 된다. 사실상, 우리 시대 대중매체와 문화상품들이 이런 수법으로 대중을 농락하며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현상유지시켜 왔다. 다시 말해 이 수법이 아니면 박정희 신화도 박근혜 대통령도 문고리3인방도, 사대강도, 땅콩리턴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오류가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생각건대, 따이한의 보트에 오르려다 강으로 떨어진 베트남 소녀는 주인공 덕수의 평생 트라우마인 여동생의 데자뷰이다. 특별히 의협심이 강하지 않은 덕수가 적의 기관총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강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한 한과 결부된 가족애의 파토스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무모한 대리만족의 가족애를 실천한 대가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된다. 힘든 시기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으로서 가족의 안위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덕수의 헌신성은 이 씬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극적 효과를 빚어내기 위해 베트콩을 모독하는 전투씬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사회적 화합 코드로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것으로 다문화가 있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이후 꿈에도 그리던 여동생 금순이 아니 막순이가 다문화의 모습으로 오빠와 재회한다. 1.4 이후 미국으로 입양돼 1980년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덕수와 극적으로 상봉한다. 그 장면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보는 나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격의 상봉 이후 막순이는 미국인 남편을 데리고 어머니 가족과 함께 하는데 일종의 다문화 가정 모습이다.

전형적인 다문화 코드로,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부부가 부산 고삐리와 맞짱 뜨는 장면에서 지역사회 최고의 악질 영감탱이 덕수가 나선다. “이노무 시끼들아, 다문화는 사람 아이가???” 뭐 이런 어투였는데... 이 또한 덕수가 특별히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파키스탄 노동자를 통해 파독 광부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탄광에서의 석탄 채굴 씬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이한 장면이 많았다. 탄광이 무너져 달구와 덕수가 갇혔을 때 석탄가루를 입에 물고 실신한 덕수를 달구가 인공호흡으로 살려내는 장면은 그 숭고한 이타정신과 우정이 더욱 빛났던 것은 그 장면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그림에 담은 카메라 감독의 탁월한 기술에 힘입었다. 캄캄한 지하에서 석탄가루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광부들이 열심히 석탄을 채굴하는 장면은 근대화 역군’(긍정적인 의미로서 이 수사법은 난생 처음 쓴다)의 화신을 보는 듯했다. 박정희 대통령 부처가 이들 앞에서 오열한 그 특별한 파토스가 이 영화를 통해 충분히 이해가 됐다.(사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 대신 일본인장교가 된 것, 조강지처 버리고 여대생과 동거하다가 다시 친일대지주의 딸로 갈아 탄 것, 여순항쟁에서 제 살기 위해 자기보다 3살 어린 백선엽중령에게 무려 1천 명이 넘는 군부 내 좌익동료들의 명단을 공개함으로써 그들을 사형당하게 한 것,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등을 조작하여 무고한 민주인사를 사형시킨 것, 부일장학회와 대구대 등의 남의 재산을 강탈하여 수 조원대의 재산을 축적한 것, 사흘에 한 번 꼴로 안가에서 주지육림을 벌인 것 등등의 반인륜적 죄과를 빼곤 괜찮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화합과 이해의 원천으로 자리하는 핵심 코드는 '가족이다. 영화 끝자락에 주인공 덕수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벽에 걸린 사진 속의 아버지를 향해 말한다. 내 참 힘들게 살아왔노라고. 그 누구도 이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빈부 차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일가족이 삶을 버텨가기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다. 우리의 주인공 덕수가 그 역할의 담지자이다. 덕수는 서울대에 합격한 남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독 광부를 지원하고, 여동생을 시집보내기 위해 월남으로 향한다. 더구나 그 시기에 자신은 해양대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영화 시작 장면도 나오지만 덕수의 로망은 선장이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지난 날 우리의 밀접한 관계망 속에 있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차는 조금 있지만 덕수네 가정사도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통해 나는 내 형제들, 특히 장남인 큰 형님의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물론 내 형제들의 사랑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육의 정은 그 어떤 이념보다 숭고한 가치이자 질긴 생명력이다. “내 참 힘들게 살았심더라는 덕수의 파토스가 한으로 점철된 이 민족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것은 차라리 죽기보다 더 힘든 삶이었고 그 힘든 삶의 무게를 끝까지 짊어지고 올 수 있었던 동력은 가족애다. 이것은 제 새끼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적 가족주의와는 다르다. 독선적인 성향의 덕수가 베트남 소녀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드는 것이나 파키스탄 노동자의 편에 서서 고삐리들과 맞서는 정의감의 원천도 가족애이다. 그 가족애가 숭고한 에토스와 결합될 수 있는 것은 가난한 과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공동체적 삶이 익숙한 세대에게 가족애는 이웃사랑 그리고 향수와도 연결된다. 이 영화에도 잠깐 비치는 정주영은 대표적인 거물 자본가이다. 그가 자본가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주의 북한사회에서 영웅으로 평가받는 것은 왜일까? 그가 북한사회에 막대한 자기 돈을 퍼부은 것은 더 큰 이윤을 노리는 자본의 투자였을까? 덕수에게 베트남 소녀가 그러하듯이, 정주영 회장에게 가난에 허덕이는 북한 인민들은 자신이 품고 지켜주고 싶은 가족의 화신일 것이다. 노회한 자본가의 그 선택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필생의 부채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영화는 항상 처음과 끝이 만난다. 옥상 위에서 덕수와 아내가 다정하게 앉아 먼 바다를 응시한다. 덕수의 꿈이 선장이었다고 말한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도 남편의 꿈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그만큼 덕수는 평생토록 자기 욕망을 억눌러 왔다. 가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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