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시험점수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무관하다

리틀윙 2014. 12. 30. 01:01

며칠 전에 시험을 봤다. 60시간짜리 연수 이수증이 필요해서 오랜만에 시험이란 걸 쳐봤다(60시간 연수는 '출석고사'를 치러야 한다). 시험과목은 ‘교실영어’. 영어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역량을 훈련하는 것인데, 시험에 대비해 나는 문장을 통으로 외우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러나 막상 시험지를 받아 보니 출제 경향이 내 예상을 벗어났다. 시험지를 받고서야 깨달았지만 OMR로 치르는 객관식 시험이니 ‘문장을 통째로 외우려던’ 나의 수험 전략은 무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험에는 도움이 안 될지언정 이 공부 방식은 나의 교실영어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됐다. 바로 이 사실이 이 글의 주제, 즉 “시험은 학습역량과 별 관계 없으며, 지적 성장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의 근간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30문제 가운데 6개나 틀렸다. 처음 시험지를 받아 들었을 때 문제 유형이 내 의표를 벗어나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문제들이 대체로 쉬워 보였다. 평소 영문법이나 어휘력에 자신이 있는 나로서는 고득점(?)을 예상했다. 그러나 알쏭달쏭한 문제들이 몇 개 있어 찍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문제들이 다 틀렸고, (추가적으로) 한두 개는 실수로 틀렸던가 보다.

 

 

 

 

이 대목에서, 며칠 전에 내 딸이 제 엄마에게 남긴 회한 가득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아마 내 딸이라면 나의 이 시험결과에 대해, “살 가치도 없나 봐”라는 심각한 자조로 가득한 자아비판을 토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딸과 비교할 때 나는 시험 점수를 특별히 잘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 양식’의 차이도 있지만, 나는 저 시험점수가 그대로 나의 지적 역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나의 시험 투쟁(?)의 상황을 복기해본다.
그 날 내가 만난 시험 문항 가운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할 만큼의 고난이도 문제는 없었다. 모든 문항들이 내 실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었건만, 간혹 ‘이건지 저건지’ 헷갈리는 문항들이 몇 개 있었다. 이를테면, ‘dizzy’라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고르는 보기로 1)shaky 2)distracted 그리고 3)과 4)의 단어는 기억나지 않는다. dizzy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잘 있을까? 그리고 shaky니 distracted를 비롯해서 보기로 주어진 나머지 단어들도 내가 다 아는 단어들이었다. 문제는 이 모든 보기의 단어들이 뜻이 비슷비슷해서 정답을 고르는 데 애로를 겪는 점이다.
내 두뇌에서 잔머리 작동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dizzy는 ‘어지러운’, ‘현기증 나는’이란 뜻인데, shaky는 ‘흔들리는’, distracted는 ‘주위가 산만한’, ‘정신 산란한’의 뜻... 그럼, 정답은 뭐지? 뭘 찍어야 하나? 난감 또 난감...
결과적으로, 틀렸다. 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이 뭔지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 삶에서, 이를테면 내가 미국인을 만나 ‘dizzy’와 비슷한 어휘를 구사할 때, shaky와 distracted 혹은 그와 유사한 단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맞는가 하는 것을 고민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렇듯 미세한 차이의 뉘앙스는 시험지라는 문제풀이 상황이 아닌, 해당 단어들이 구체적인 맥락으로 제시된 책자 속의 정보로 주어질 때, 내 능력으로 충분히 그 차이를 식별해 낼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섬세한 변별력은 무슨 전문적인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나의 유능/무능과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험의 목적은 (초등)교사의 교실영어 능력을 테스트 하는 것인데, 교재에 'dizzy'라는 말은 '몸이 어지러운 사람은 보건실로 가도 좋다.'는 문장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이런 문장을 구사할 일은 눈꼽만큼도 없고 그것도 'distracted'라는 고급 동의어를 구사할 일은 더더욱 없다. 한마디로 이 시험은 '타당도' 면에서 엉터리인 것이다. 연수주제에 충실하여 제대로 실력을 평가하려면,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는 식의 서술형 주관식으로 출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험은 무조건 객관식의 '찍기'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럴려니 변별도를 갖추기 위해 쓸데없이 어렵게 문제를 '배배 꼬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OMR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시스템인가?

 

 

나의 무능한 시험 결과를 자의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다음을 보라.

개구장이와 개구쟁이, 설레임과 설램, 짜장면과 자장면, 초가집과 초갓집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가 하는 식의 맞춤법 시험에서 백점 못 맞으면 국어 실력이 무능한 사람인가? 미국 대학원에서 본국 학생들이 졸업논문을 작성하고 나서 자신의 글이 영문법이나 맞춤법에 맞는지 여부를 한국인 학생에게 부탁한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은 영문법에 도가 터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인 대학원생이 한국인 학생보다 영어를 더 못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4형식 수여동사(give, supply, provide, ask 등등) 구문을 3형식 문장으로 바꿀 때 전치사를 뭐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을 일일이 외우는 것은 무모한 짓거리이다. (학교에서 이런 걸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사소한 것을 시험에 출제하여 아이들 줄을 세우고 학업 스트레스와 학습의욕을 좌절시키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해롭다는 뜻이다.)

. “My teacher asked a difficult problem of me.”에서 ‘of me’ 대신에 ‘to me’를 쓴다고 해서 미국인과의 대화에서 흉잡힐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은 ‘개구쟁이’를 ‘개구장이’라고 한다고 해서 비웃음을 쌀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구나 외국인이 ‘개구장이’라고 말할 때 어떤 한국인이 그를 비웃겠는가? 우리는 그저 영어로 쓰인 책에서 ‘ask of me’라는 표현을 만날 때 ‘of’라는 전치사가 ‘~의’라는 뜻이 아니라 ‘~에게’라는 뜻이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

요컨대, 나는 그 날 시험에서 “틀릴 만한 문제를 틀렸으며, 그것은 나의 지적 무능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 딸들의 시험지를 살펴보면, 대부분 ‘틀릴 만한 문제를 틀린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교사와 학생 간의 무모한 ‘숨바꼭질’ 놀음일 뿐이다. 마오쩌둥은 이런 시험을 ‘게릴라 전투’에 비유했는데, 시험 점수 잘 받는 아이는 이 무익한 게릴라전투에서 유능한 전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시험을 잘 친다는 것을 뜻하고, 시험 잘 치는 것은 숨어 있는 정답을 잘 골라내는 능력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전과목 올백 맞는 아이들을 보면, ‘대단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기보다, ‘묘기 시범’에서 신기의 기술을 부리는 재주꾼 정도로만 보인다.

바로 이런 점에서 ‘토익점수’나 ‘토플 점수’ 따위는 무의미하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토익 고득점자가 더러 있다. 반면 나의 점수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와 달리 나는 이를테면, 웬만한 인문학 원서는 영어사전 없이 무난히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은 이런 나의 ‘영어실력’을 부러워한다. 영어단어를 그렇게 많이 아는 비법이 뭐냐고 물어온다. 영어어휘력을 기르는 비법은 따로 없다. 그것은 한국인이 한국어 어휘력을 기르는 것과 똑같다.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면 영단어 어휘력은 저절로 길러진다. 뉴스든 인터넷 정보든 사전 없이 영문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영어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역량’이 아닐까? 이런 역량이 토익점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단호히 말하건대, 별 관계가 없다. 토익/텝스 점수를 단기간 내에 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원에 나가는 것이다. 학원 강사는 문제에서 답을 찍는 비법을 전수해준다. 이를테면, “극단적 부사가 들어 있는 문장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잔머리가 지적 역량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시험 공화국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치르는 시험들은 대개, 출제자는 정답을 꼭꼭 숨겨두고 수험생은 그게 어디 숨어 있는가를 찾아내는 집요한 숨바꼭질에 다름 아니다. 이 소모적이고 무익한 머리싸움이 학습자의 지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잘 없다. 시행착오를 통한 발전은 시험 상황이 아닌 학습자 주도의 문제집 풀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는가? 그리고 시험이든 문제집 풀이든 정답 골라내는 훈련은 지성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다음 중 ~가 아닌 것은?”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삼성이 애플을 이기는 방법이라든가, 현재 만나는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처럼, 인간 삶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문제는 대부분 정답(획일적인 답)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적 능력은 절대로 점수로 환원할 수 없다. 굳이 시험을 쳐서 선발을 해야 한다면, 프랑스의 대학입학고사(바깔로레아)처럼 논술형 시험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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