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뒹굴뒹굴 하며 느긋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방학이 좋다.
예전부터 보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계속 미뤄 왔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1966)>를 봤다.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 헐리우드 식의 흥미나 말초적 자극을 기대하는 이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No pain, no gain! 인내심을 갖고 읽어내려 가다보면 남는 것이 있다.
작품 프로필에 대해서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gozorba/20154655279
브레송이란 감독의 영화는 처음인데, 이 분이 특별히 존경스러운 점은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문 영화배우를 기용하지 않고 촬영장의 마을 사람들만을 캐스팅 하는 창작 스타일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필름에 연기가 아닌 삶을 담고자” 한 것이다. 강남에 빌딩을 여러 채 갖고 있는 장동건이가 부산 뒷골목 양아치의 리얼리티를 정확히 그려내는 것은 한계가 있을 터, 배우의 연기에는 일정한 허구와 위선이 불가피한 점에서 연기는 결국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당나귀이다. 브레송의 입장에서 이 당나귀가 가장 연기를 사실적으로 잘 한 배우이다. 카메라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또 힘들지도 않으면서 힘든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 같은 인간들의 모진 학대와 착취에 지칠대로 지쳐 흑흑 거리는 몸짓이나 그 순진한 눈망울에 드리워진 슬픈 표정, 이것은 연기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당나귀의 삶이다.
그러나 브레송은 동물인권론자도 녹색환경론자도 아니다. 브레송의 천재성은 바로 이 당나귀를 통해 인간의 삶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내는 점이다. 영화 내내 발타자르와 나란히 등장하는 소녀는 당나귀의 아바타이다. 임영박같은 양아치 애인으로부터 실컷 유린당하고 버려지는 그녀의 운명은 발타자르의 그것과 복사판이다.
인간 사는 곳이면 어디든 발타자르의 분신이 도처에 늘려 있다. 출근길 아침마다 만나는 폐휴지 할머니, 자기 몸무게보다 몇 곱절 더 무거운 리어카를 가쁜 숨을 내몰아쉬며 언덕길로 끌어 올리는 할머니에게 드리워진 삶의 무게는 당나귀의 그것 못지않다. 그리고 가련한 소녀의 운명 또한 그대로 여성 보편의 비운이 아닐까?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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