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예술가와 광기

리틀윙 2010. 3. 9. 22:02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명저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에 대한 매우 신선한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진 이 저서는 원래 그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재구성하여 세상에 발표한 것이었다. 동성애자에다가 한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결국 에이즈로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삶 자체가 어쩌면 ‘광기’로 일관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현대를 대표하는 이 위대한 지성을 누가 감히 ‘미치광이’라 할 것인가? 이 글을 여는 부분에서 이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은...... ‘광기’와 ‘천재성’은 밀접하게 관계있음을 암시하고자 함이다.


푸코의 필생의 화두는 “지극히 단순한 상식에 대해서조차 회의를 품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광기’에 대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1) ‘광기’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자명한 상식이 아닌,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2) ‘광기’에 대한 평가나 이해가 역사적으로 한결같지가 않았다.

 


 

예를 들면, 중세유럽에서 ‘광기’는 정신병이 아니라 특별한 재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로 넘어가면서 ‘광기’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광기’ 자체가 해악한 것이라는 대중의 동의가  아닌 순전히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권력 유지에 해가 되는 ‘광기’는 반사회적인 일탈로 규정하여 정신병원 같은 것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격리시킨다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심한 경우 처형시켜버렸다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과 지식은 동의어라고 하는데,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은 식자층으로 하여금 자기 권력의 현상유지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생성 유포하게 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 이는 “당대의 지배적인 의식(이데올로기)은 항상 지배계급의 의식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누구나 '광기'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광기’와 ‘이성’이라는 수레의 나란한 두 바퀴에 의존해 사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데, 역사적으로 특정시대에 이르러 권력의 단속 때문에 인간은 ‘광기’를 퇴화시키고 ‘이성’만을 취함으로써, 말하자면 ‘반쪽 의식’ 만을 작동시켜왔다는 것이 푸코의 설명이다.  

 


위와 같은 푸코의 논리체계에 수긍할 수 없다는 분들을 위해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보충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담론체계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이론보다 더 유력한 것은 없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놓치면, 인간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 따뜻한 시선”이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이 이드(id)-에고(ego, 자아)-슈퍼에고(super ego, 초자아)라는 3단계로 발전해간다고 설명한다.

‘이드’는 도덕적/사회적 동기에 영향 받지 않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원시적/본능적 욕구이다. 이드는 쉽게 말해,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꼴리는 대로” 작동한다. 유아기에는 이드가 우세하다. 어린이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면 뭐든 충족시키려 애쓴다. 이드를 지배하는 것은 ‘쾌감원칙’이다.

유아에서 유년기로 그리고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쾌감원칙’ 위주의 이드는 여러 가지 현실적 장벽에 부딪히면서 꺾여지는데 이것이 ‘에고’이다. 에고를 지배하는 원리는 ‘현실원칙’이다. 즉,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것이라면 그것을 절제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드에서 에고로의 발전은, 좋게 말해 “의젓한 사회구성원으로의 성장”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길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화(socialization)’란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사회화’를 오직 인간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일종의 미덕으로 규정하지만, 사회화는 순치(길들임, domestication)의 산물이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광기’를 거세시킨 결과인 것이다.


물론, 광기와 관련하여 푸코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중세나 그 이전의 원시사회에서도 ‘사회화’는 이루어졌다. 프로이드 이론을 푸코 이론과 접목시키려는 나의 이 시도는 학문적으로 전혀 검증된 바가 없을 것이기에 나의 주관적인 논리라는 것을 미리 일러두지만, “예술과 광기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하고 예술가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이러한 시도가 유용하리라 본다.


나의 원근법은......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해서 이루어진다”(주1)는 논리에 입각하여, 광기를 허용했던 중세시대를 ‘이드 단계’로, 광기를 엄단하기 시작한 시대를 ‘에고 단계’로 비유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쾌감원칙이 지배하는 이드에서 현실원칙 중심의 에고로의 변화에 대한 프로이드의 설명은 학계에서 유력한 ‘사회화’ 이론으로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인간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볼 때, 이 유기체 또한 어린이에서 소년소녀로 그리고 원숙한 성인(노인)으로 성장/발전해갈 것인데, 이 3단계는 프로이드가 설명한 “이드-에고-슈퍼에고”의 단계를 밟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인류사회가 최초 원시공산사회(=무계급사회)에서 고대-노예사회, 중세-봉건사회, 근현대-자본주의사회를 거쳐 미래-공산사회(=무계급사회)로 발전해간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류역사의 발전은 한마디로, “소외의 극복과정”인데, 이것은 헤겔이 인류역사를 “소외된 절대이성의 회복과정”으로 본 것을 (말하자면)패러디한 것이다. 원시공산사회(=무계급사회)에서는 소외가 없었는데, 계급사회의 도래와 함께 소외가 발생했으며, 현재의 자본주의사회는 그 소외의 정도가 최고조로 극심한 상태인 것이다(마르크스). 극심한 소외의 사회에서는 이드와 에고 사이의 갈등 또한 증대되는 법이어서 정신병리의 현상이 심화된다(프로이드).


아울러, ‘광기’에 대한 통제의 강도도 가혹하다. 푸코가 ‘광기’에 대한 인식이 인간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고 했는데, 나는 ‘광기’가 소외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계있다고 본다. 소외가 없었던 시대(=원시공산사회)에서는 ‘광기’도 없었다. 아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 ‘광기’가 오늘날 말하는 ‘미치광이’의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적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계급사회인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는 푸코의 말대로 권력에 의한 광기의 통제가 매우 억압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광기’ 자체가 사회적으로 해악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지배-피지배 관계의 현상유지를 위해 억누르는 것이다.

개인의 이드에 내재된 ‘광기’를 에고로 길들이는 메커니즘이 ‘사회화’라 할 때, 사회화를 담지하는 대표적인 기관(agent)은 가정과 학교(기독교문화권에서는 ‘교회’도 포함)이다. 이 기관에는 푸코가 말한 ‘권력’이 존재한다. 부모와 교사가 그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권력자들이지만, 이들 또한 사회화의 산물이며 이 사회를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유념할 점은,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이들 ‘작은 권력자들’은 어린아이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화의 담지자(agent)들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프로이드 이론의 한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의 상호보완성을 짚어보기로 하자. 나는 프로이드의 한계가 한마디로 ‘사회학에 대한 무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프로이드(1856-1939)는 마르크스(1818-1883)가 한창 활동할 때 태어났는데, 만약 프로이드가 헤겔 변증법이나 마르크스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섭렵했더라면 그의 심리학이 훨씬 위대한 결실을 맺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이드의 위대함은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에 기인한다.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소한 인간 행위에 대해 그는 그것이 일어나는 정확한 인과관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인간은 항상 사회적 관계망 속의 인간”이다(Marx). 인간 내면에 대한 내성적(內省的) 관찰과 분석에 의존한 나머지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개인심리학’에 국한된 것이 한계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상징되는 그의 인간관계망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에 갇혀 있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프로이드의 탐구가 미시적인 차원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토템과 터부]에서 프로이드는 “원시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미시적 차원이든 거시적 차원이든, 개인의 이드를 지배하는 권력관계에 대해 모조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논리로만 설명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역사적 상대성과 같은 사회 내에서 개인이 겪는 억압의 차이가 발생하는 인과관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점이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또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기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심지어 유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고 나는 본다)

첫째,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천재적인 창의성이 빛나는 이론이기는 해도 지나치게 신비적이며 또 경직된 측면이 있다. 프로이드는 대단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여 자신 또한 끝까지 가부장적인 권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 사회나 가부장이 심한 가정에서나 유효할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서는 모성이 지배하는 사회도 있었으며, ‘성적 허용’과 관련하여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 억압의 강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 이에 관한 유용한 참조체제로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보라. 마르크스주의의 원전 가운데 가장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또 재미도 있는 책이다. 인류학에 관한 책은 전부 재미있다.)

둘째, 사회화 과정에서 어린 자녀가 부모로 받는 억압은 “성과 관련한 억압”이 전부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관계망”의 핵심은 ‘생산관계’인데, 가정에서 오이디푸스(=어린 아이)를 억압하는 권력자(=부친) 또한 직장 생활 속에서는 ‘오이디푸스’가 되어 어떤 억압을 받는다. 그리고 그 억압(스트레스)의 질과 양은 그가 생산관계 내에서 어느 위치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진대, 이것은 그대로 각각의 가정에 전이된다. 그 억압의 질과 양의 차이에 따라 그 자녀의 사회화나 성격 형성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단적인 예로, 재벌가의 황태자와 평범한 가정의 아이는 전혀 다른 사회화의 ‘수업’을 받게 된다. 전자에게는 ‘근검절약’이나 ‘근면성실’의 자질이 강제되지 않으며 어디 가서 절대 기죽지 않기를 학습 받는 반면, 후자에게는 노예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습관을 주로 학습 받는다.

경제조건이 다르면 가정 내에서 어린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의 차원도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자명하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사회적 부적응을 겪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음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알콜리즘에 빠진 폭력적인 아버지에, 어머니는 집 나가고 없는 가정에서 자란 어린 아이는 이드단계(구순기, 항문기)에서 심각한 욕구불만으로 이미 성격이 삐뚤어질 가능성이 많으며, 에고단계(성기기)에서 그가 갖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차원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지하에서 만약 마르크스가 프로이드를 만난다면 다음과 같이 그의 한계를 짚어줄 것이라 상상해본다.

“존재(=경제조건)가 ‘의식’을 규정할뿐더러 존재가 ‘무의식’까지도 규정한다.”


셋째, 프로이드의 사회화 이론은 최초의 에고가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초점이 국한되어 있는 한계를 가진다. 이는 인간 의식이나 행위를 이해함에 있어 그 기저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과정에 대한 탐구가 그의 과업의 전부였기 때문에 갖는 필연적인 한계이다. 무의식에 관한 탐구가 ‘정신분석’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나, 이것은 동시에 프로이드 이론의 빛나는 장점이기도 하다. 즉, 바로 이 점이 프로이드가 마르크스를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프로이드 이론의 장단점을 떠나, ‘사회화’는 인간의 전(全) 생애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글의 주제인 ‘광기’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는 단계는 최초의 에고가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를 한참 지나 ‘성인기’에 이르러서이다.

 

 

‘광기’는 프로이드 이론에서 인간 정신에너지 혹은 성적 에너지를 의미하는 ‘리비도’와 밀접히 관계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리비도를 갖고 있듯이, 광기(madness) 또한 상대성의 문제일지언정 누구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3). 요컨대 우리는 모두 “잠재적 광인”인 것이다. 이는 정신이상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프로이드 이론과도 부합한다: “이상과 정상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며, 전자에게 나타나는 경향은 후자에게도 나타는 경향이 과도한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광기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것이 반사회적 형태로 표출될 때이다. 예술가의 경우 그 광기에서 파생된 심각한 정신이상의 증세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경우가 많다.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는 정신분열을 겪다가 마침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자신의 예술가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알콜리즘이나 마약 중독의 늪에 빠져갔던 것을 우리는 지켜봐왔다. 사실,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좋게 봐서 기행(奇行)이지만, 보편적인 소시민적 윤리적 잣대로 볼 때는 ‘일탈’ 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 하다. 그러나 소시민적 윤리의식이나 법논리 따위로 예술가들의 내면세계를 재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광기(insanity4)) 또는 증신이상증세는 이드의 욕구분출이 지나칠 때 에고가 그 욕구를 차단하기보다는 허용함으로써 유기체를 지켜내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것이다. 이는 마치 홍수가 났을 때 무리하게 댐의 수문을 막아 댐이 터지게 하기보다는 수문을 열어 성난 물줄기를 흘려보냄으로써 시스템을 지키는 이치와도 같다. 그런데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의 경우는, 갑작스레 닥쳐온 큰 재앙 따위가 아니라면 ‘홍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웬만한 물줄기는 댐의 저장용량 범위 내에 다 수용될 것이니 그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 ‘슈퍼에고’인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예술가들의 심적 세계에선 ‘홍수’가 자주 발생하는가?

무엇보다,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민감한 감각기관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예민하다(sensitive) 함은 이성과 감성 양면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무릇,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은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느낄 수 있으며, 느끼는 만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책을 멀리해도 된다거나 지성의 단련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는 사고방식보다 더 우스꽝스런 것은 없다. “머리 나빠서 공부를 잘 못하니 예술고나 음대에 진학 하겠다”는 미친 발상은 이 지구상에서 한국사회에서만 벌어지는 코미디일 것이다.

자본주의사회는 ‘소외’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소외’는 한마디로, “죽은 것이 산 것을 지배하는”, “자본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지배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소외는 필연적으로 ‘광기(insanity)’를 파생시킨다. 사실, 미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미치지 않은 경우보다 미친 경우가 오히려 ‘정상’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이 한국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정신병리 현상이 심각한 증세에 있다. 그 속에서 모두들 미쳐가고 있다. 만약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이 사회에 온다면 분명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는 아무 문제없는 듯 매우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만연해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insanity(미친 상태)’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게 되니 이런 사회가 에릭 프롬이 말하는 ‘insane society’이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그 시스템이 아무리 불합리한 경우라도 살아남기 위해 그에 적응해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insane society’의 전형이라 할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가 겉보기에 멀쩡하게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insane society’에 대한 적응력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길러진다. 어린 시절의 사회화보다 성인기에 이르러 생존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이른바 ‘직업사회화’를 통해 미친 사회에 대한 내성(耐性)이 길러질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그들 존재 양식의 특성상 ‘사회화’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 사회화는 ‘길들임’인데 자본주의사회의 길들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예술가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직관력을 길러가는 한편, 사회적․개인적 모순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을 갖게 된다. 보통 사람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이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수 있으며, 반대로 보통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질적 가치 따위에 대해 예술가들은 초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선량한 예술가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가치에 찌든 예술가는 그 자체로 이미 예술가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외의 기제에 적응이 된 예능인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 기능공 내지 예술 장사치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소외는 필연적으로 광기를 파생시킨다. 비인간의 사회에서 예술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미치지 않는 경우보다 미치는 경우가 오히려 정상이 아닐까?

 

 

빈센트는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분열은 당시 네덜란드의 참혹한 자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모순에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그의 정신분열을 부추겼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표현대로 자본주의 자체가 정신분열이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한때 광산촌에서 목회자로 복무한 적이 있었는데,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노인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회의 모순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그래서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보듯, 그의 그림 소재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의 화풍은 늘 어두운 일색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것을 구매해 줄 부르주아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것이었기에 그의 동생 테오도르는 자신이 근무하는 화랑에서 천재적인 형의 그림을 단 한 편도 팔아주지 못했다. 가난한 동생이 부쳐주는 돈으로 입에 풀 칠 하던 인간 빈센트의 실존이 얼마나 비참했으며 천재화가로서 자신을 몰라주는 그 사회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또한, 예술가들은 선천적으로 특별한 ‘광기’ 또는 리비도를 갖고 태어난다. 특별한 광기(madness)를 지니고 있기에 예술가가 되며, 또 예술 활동에 몰두하면서 그의 광기는 더욱 섬세하게 계발되어간다. 예술가와 광기의 필연적 연관에 관해서는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이란 멋진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크게 아폴론적인 유형과 디오니소스적인 유형이 있다고 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으로 이성의 상징인 반면,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술의 신으로서 “도취, 본능, 쾌락, 열정” 등의 요소, 한마디로 광기의 상징이다. 철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예술 특히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니체는 예술가들을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보았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그 천재성에 비례하는 심한 '광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광기(madness)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부정적 측면으로 표출된 경우가 일탈로서의 광기(insanity)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예술작품'으로 나타난 것이니, 이것이 프로이드가 인간세계에서 예술 또는 문화가 발생하는 이치를 설명한 '승화(sublimation)'라는 개념이다.

예술가들에게 광기(madness)와 예술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자신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특별한 광기(madness)가 예술적으로 승화되면 창작활동으로 이어지고 승화에 실패하면 술이나 약에 자신의 심신을 내던지는 일탈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한마디로 예술가의 삶은 승화라는 ‘씨줄’과 광기(insanity)라는 ‘날줄’이 얽히어 점철된 여정이 아닌가 싶다. 실로 우리는 승화와 광기(insanity)의 양극단의 줄타기를 왔다 갔다 했던 수많은 뮤지션들을 지켜봐왔다

“모든 예술은 승화의 산물”이라는 프로이드의 명제를, 이 글의 맥락에 맞춰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광기와 예술성이라는 모순된 두 계기(moment)의 변증법적 통일의 산물이다.” 모순된 두 계기는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수레의 나란한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간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은 법. 광기가 극단적인 경향을 띨수록 소외의 심도도 깊어 일탈의 심각성도 비례해서 증대되지만, 그것을 승화시켰을 경우 탄생하는 작품의 예술성도 커지는 법이다. 이 같은 이치의 전형을 우리는 베토벤의 9번(symphony No.9)에서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한 소리”로 평가되는 베토벤의 ‘합창’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위대한 음악을 짓기 전에 베토벤은 삶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뮤지션에게 귀머거리가 됨은 그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로 베토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몇 번이고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으려 마음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컨대 이 시기에 그의 광기는 극에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그 광기를 승화시켜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다주었다. 베토벤이 음악의 성인(樂聖)이라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예술가의 삶의 고뇌와 희노애락이 승화된 결정체인 것이다. 예술가가 생의 위기를 맞아 얼마나 숭고한 모습으로 그의 광기를 승화시켰는가에 따라 그 작품성이 가늠된다. 따라서, 광기와 결부된 위기가 없으면 위대한 작품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라면 기꺼이 위기를 맞이할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위기를 맞아 알코올이나 약에 의존하는 것은 도피이고 퇴행이다. 결국, 훌륭한 예술가와 불행한 예술가의 차이는 프로이드적으로 말해, “승화냐 혹은 도피기제냐” 하는 말로 요약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삶은 "승화와 도피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줄타기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그 최종적 삶이 도피 형태로 마감될 경우라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첫째, 그 결과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심파씨(sympathy)로 그들을 안아야 한다. 돈 맥클린Don McLean의 [Vincent]라는 노래가 이 같은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그리고 당신의 건전한 광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예술가들이 약에 의존하는 것은 룸펜들이 그러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뭐가 다른지 이 글을 진지하게 읽은 분들은 알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술가들의 광기 혹은 일탈에 대해 소시민적인 윤리의식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노파심에서 덧붙이건대,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도덕적 관용이지 법적 관용은 아니다. 민주사회에서 법앞에는 모두가 평등해야 하니까...

(뮤지션들에 대해 일반인이 갖기 쉬운 편견으로써 이솝우화의 '베짱이'를 떠올리기가 쉽다. 음악행위에 대해 남들 열심히 일 할 때 그저 한가롭게 띵가띵가 하는 짓거리로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술행위도 엄연히 '노동'으로 봐야 한다. 더구나 그 노동은 보통의 노동보다 훨씬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프로 뮤지션의 경우, 하루에 10시간 정도를 음악연습이나 창작 그리고 연주활동에 투자한다고 한다. 말이 10시간이지 10시간 동안 기타 또는 드럼과 씨름하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는 절대 실천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예술가라도, 엄격한 자기관리와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그 길을 오래 갈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술가들이 왜 약을 절제하지 못하는가...? 지금 그걸 적고 있지만 솔직히 나도 정확히 모른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아서이다.)


둘째, 약에 의존하며 생의 휴식기를 앞당기고자 했던 뮤지션들은 어떤 면에서 예술가로서의 자기 생애에서 할 일을 다 하고 갔던 사람들이다. Charlie Parker, John Coltrane, Art Pepper, Chet Baker, Jimi Hendrix, Jim Morrison, John Bonham, Tommy Bolin...... 소년기에서 중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영혼을 풍성하게 해준 보석 같은 그 이름들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단명했기에 이들이 우리에게 제공했던 음악성마저 풍족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광기로 인해 이들 삶이 불행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 개인적 자질 외에 이 사회의 자질이 큰 몫을 차지하기에 우리가 이 사회를 바꿔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보다 덜 소외된 사회로, 예술가들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회로 말이다.


사회가 바뀌면 광기(insanity)로 고통 받는 예술가들이 줄어들 것인가?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일반인들이 사물에 대해 느끼는 이성과 감성이 예술가들의 반만큼만 민감할 수 있으면 이 사회의 혁명은 훨씬 손쉽게 이뤄질 것이다.

사회의 진보는 예술의 진보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니체는 모든 예술가는 철학자이어야 하고, 모든 철학자는 예술가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인 동시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농사를 짓는 사람도 철학적 소양을 갖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저녁에는 악기를 들고 오케스트라나 밴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삶이 곧 예술인 사회, 모두가 나름의 예술적 광기를 건설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사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를 위해 특별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교육체제만 바꾸면 된다. 이 미친 정권이 '영어몰입'에 투자하는 비용의 절반만 '예술 몰입'에 투자해도..., 이 미친 사회의 학부모들이 사교육시장에 털어 붓는 돈의 10분의 1만으로도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아무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 소모적인 광기(insanity)이다. 이 엉뚱한 광기를 예술적 광기로 치환시킨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 것인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1)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명제는 독일의 발생학자(진화론자) 핵켈(Haeckel)이 제시한 것이다. 태아가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태아의 최초 모습은 척추가 휘어 있는 물고기의 모습인데 10달 뒤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태아의 성장은 약 30억년동안 인간이 진화해온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어류 → 양서류 → 파충류 → 포유류의 과정. 여기서 인류의 진화는 계통발생이고, 태아의 성장은 개체발생에 해당한다.

인류의 생물학적 계통발생을 설명하는 논리가 다윈의 ‘진화론’이라면, 인류사회의 계통발생적 발전을 설명하는 논리가 바로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 하겠다. 그런데, 한 인간의 사회성(인격, 양심)이 발전해가는(=개체발생) 원리가 인류사회의 발전(=계통발생) 원리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나의 논리이다.


2) 헤겔의 ‘소외’와 마르크스의 ‘소외’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그 차이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소외’는 실존주의에서의 ‘소외’ 개념과도 다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소외’라는 말은 실존주의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마르크스의 ‘소외’를 일상적인 의미의 ‘소외’로 이해해도 좋겠다.


3) “내겐 어떠한 광기도 없다”는 말은 “내겐 리비도가 없다”는 말과도 같은데, ‘식물인간’이 아닌 이상 그런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광기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이는 모든 인간에 내재된 것으로서 우리의 이성과 정념을 추동하는 에너지의 원천으로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리비도’ 바로 그것이다. 일상적 용어로 보통 우리가 ‘열정’이라 부르는 것이 이것과 관계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특정 대상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표출할 때 보통 ‘~에 미쳤다’는 표현을 쓴다. 낚시 또는 바둑에 미치기, 음악에 미치기, 미친 듯이 사랑하기...

푸코의 '광기'와 프로이드의 '리비도', 그리고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기질', 이 세 가지는 거의 동의어와도 같은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세 가지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핵심적인 요소는 '성적 에너지(=성욕)'이다. 이 같은 근거에서, 예술가들에게 왜 바람둥이가 많은지, 위대한 예술가들이 한결같이 여성편력이 심했던가에 대해 설명이 된다. 물론, 그들의 끼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4) 광기에 해당하는 영단어는 insanity 또는 madness이다. 이 글에서 insanity는 부정적 의미의 광기(=정신이상), madness는 긍정적 의미의 광기(=열정, 리비도)라는 뜻으로 쓴다. 이 두 단어가 의미상으로 특별한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편의상 이렇게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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