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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abstract

리틀윙 2021. 1. 27. 13:29

<추상>

 

어떤 낱말은 영어보다 우리말이 훨씬 어렵다. ‘추상’이라는 낱말이 그러하다.

 

추상에 해당하는 영단어 abstract는 1)형용사 2)명사 3)동사를 동시에 함의한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형)은 추상적인, (명)은 추상, (동)은 추상하다가 된다. 그런데 우리 일상에서 형용사로서 ‘추상적인’이란 말은 잘 써도 명사 ‘추상’과 동사 ‘추상하기’는 거의 안 쓴다. 낱말을 쓸 일이 없으면 해당되는 개념이 우리 관념 속에 자리하지 않는다.

 

명사로서 ‘추상’이란 낱말 대신 ‘초록’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사실 초록(抄錄)은 추상이란 말보다 더 어렵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써본 사람은 논문 말미에 ‘영문초록’이란 것을 작성한다. 논문 내용을 압축하여 영문으로 나타낸 것이 영문초록인데, 영어로 ABSTRACT(초록)라 적고 작성한다.

 

추상이란 개념도 어렵거늘 초록은 더욱 그러한데, ‘abstract’란 말은 쉽다. abstract는 동사로서 ‘추출하다’, 명사로는 ‘추출(물)’ 혹은 ‘개요’라는 뜻이다. (초록이라는 쓸데없이 어려운 낱말은 우리말 사전에서 없애야 한다. 개요라 하면 될 것을...)

 

abstract는 ‘개요’라는 뜻 외에 (글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추상(하다)’이라는 뜻이 있다. 자, 이제 ‘추상(하다)’은 ‘추출(하다)’의 의미라는 것이 밝혀졌다. ‘추상하다’라는 개념은 어렵지만, 우리 모두는 숨을 쉬고 밥을 먹듯이 추상을 하며 살아간다. 이를테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기에 어떤 식으로든 전체 내용을 추출해서(추상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오늘 있었던 일을 글(일기)로 쓰든지 그림(그림일기)으로 나타낼 때도 추상을 한다. 즉, 있었던 모든 일을 글 또는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득불 추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이들이 간혹 "알기는 아는데 말로 설명을 못하겠어요"라고 한다. 제대로 된 앎이라 할 수 없는 이것은 자신의 앎을 추상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결국,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추상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하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그나마 입말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 맥락이 공유되는 경우가 많아 대충 말해도 뜻을 전할 수 있지만, 불특정 다수를 독자를 삼는 글말은 정교한 추상 능력이 요구된다.

 

추상(하기)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나 글쓰기를 지도하는 교육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어떤 능력을 개발함에 있어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개선 방안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글을 잘 못 쓰는 아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추상’의 전략에 대한 감이 전혀 없는 아이다. 이런 아이에게는 글쓰기를 지도하기 앞서 생각 이끌어내기(추상하기)를 먼저 도와줘야 한다.

 

교사: ㅇㅇ아 어제 집에서 뭐 했니?

아이: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교사: 아무 것도 안 하고 숨만 쉬었니? 잘 생각해봐 분명 무엇을 하거나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

아이: A, B, C, D... 를 했어요.

교사: 그 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 말하고 싶은 것을 추출해보자.

아이: 친구와 게임을 한 일이요.

교사: 무슨 게임을 했니? / 재미있었니? / 어떤 부분이 왜 재미있었지?

...

 

입말이든 글말이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추상을 해야 한다. 말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추상 전략을 강구하면서 우리의 사고력은 정교하게 발달해 간다. 말을 하지 않는 동물은 추상을 할 일이 없으므로 사고가 발달할 수 없다.

 

인간도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보다 말을 자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사고가 발달한다. 특히 입말에 비해 고도의 추상 능력이 요구되는 글말은 사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린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글쓰기는 정말 중요하다.

 

1.19.

 

.................

 

<추상적인 진리는 없다>

 

한 10년 전에 영어전담 할 때의 일이다. 이명박 정권기의 ‘어린쥐’ 교육정책 땜에 영어교사들에게 영어로 수업하기를 강조하면서 지역의 거점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를 중심으로 초등 영어전담 교사들이 영어로 free talking 하는 연수가 있었다.

 

원어민 교사는 30대 초반의 백인 남성 미국인이었는데 나름 진보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초등에선 내가 영어를 좀 한답시고 프리토킹을 주도해갔는데, 그날 주제가 정치적인 내용이어서 어떤 맥락에서 내가 ‘neo-liberalism 신자유주의’ 이야기를 했더니 이 분이 내 말뜻을 이해 못하는 것이었다. “리버럴은 좋은 것인데 왜 부정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리버럴리스트는 우리나라의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적 포지션에 해당하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터이다. 이 분의 말은 “자유는 좋은 것인데 자유를 업데이트한 신자유주의는 더욱 좋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신자유주의’라는 낱말을 처음 접할 때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다소 지면을 할애하더라도 이러한 오류에 대한 해명을 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이 “추상적인 용어 사용”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자유’가 문제가 되는 것을 논하자면 초기 자본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시대의 국가는 ‘야경국가’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국가의 간섭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를 체계화하였다.

 

이 자유주의 정책은 1929년 미국 경제대공황이 터지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케인즈를 위시한 리버럴리스트들이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의 필요성을 제안하면서 수정자본주의가 탄생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간다. 대공황으로 사멸의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가 케인즈라는 구원투수의 활약에 힘입어 회생함에 따라 1970년대에 이르러 다시 “국가 개입의 최소화 및 시장경제 자유의 활성화”라는 새로운 자유주의가 발흥했으니 이것이 ‘신자유주의’다.

 

위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초기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케인즈주의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러한 수정자본주의의 취지에 대해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조치라 비난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라는 지고의 가치가 수정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위기에 몰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의 실체가 무엇인지 논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을 흘리며 탄생했다. (관련 내용으로 아래 덧글에서 링크 걸어둔 필자의 블로그 글 참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자유’란 “자본가가 노동자를 마음껏 착취할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IMF 이후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를테면 10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과업을 7명이 감당하게 하고 3명은 해고시키는 야만적 조치가 마구잡이로 진행되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책략이 ‘노동의 유연화’인데, 유연화는 영어로 flexibility이다. 이 단어는 ‘융통성’이란 뜻도 있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융통성’이란 말도 뭔가 좋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융통성이 누구를 위한 융통성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10명이 하던 일을 7명이 하면, 쫓겨난 3명은 아침에 양복차림으로 가족들에게 출근 인사를 한 뒤 오락실을 전전하다가(한스밴드의 '오락실' 노랫말이 이런 내용이다) 나중에 노숙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남은 7명은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심신이 지쳐가는 것은 물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위기의식 속에 하루하루 연명해간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로 한국은 IMF를 조기 졸업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지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IMF 이후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와 기업은 더욱 부유해졌으니, 신자유주의의 '자유'가 초래한 결과라 하겠다.

 

누구를 위한 자유, 누구를 위한 유연화인지 생각해야 한다.

 

.

 

추상적인 진리 따위는 없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bstract truth. Truth is always concrete.

 

정치가로서는 몰라도 사상가로서 레닌은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정치 성향을 떠나 이 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사람 좋다’는 말을 쉽게 하는데, 추상적인 말이어서 문제다. 사람이 좋은 것은 좋은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좋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따져야 한다. 나중에 글 쓰겠지만, 나는 학교에서 좋은 교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좋은 교장이 누구에게 어떤 모습으로 좋은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극기 할배들이나 수구 정당이 민주당 정부(똑같이 보수이지만)를 공격하거나 할 때 걸핏하면 내세우는 가치가 ‘자유’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남하한 깡패들(시라소니가 대표 인물)도 자유를 위해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4.3 제주에서 양민을 마음껏 학살하는 자유를 누렸다.

 

무지몽매한 대중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교수라는 사람들도 이를테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하면서 각각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니 어쩌니 떠든다. 대학교수라는 자들이 이러니 촌놈들은 헷갈린다. 도대체 사회주의를 선호하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가? 영화 ‘변호인’에서 보듯, E.H.카의 책을 읽는 대학생이 빨갱이로 몰려 죽도록 고문당하는 사회가 자유국가인가?

 

그 서슬 시퍼른 독재권력의 총칼에 짓이기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민주투사들이 염원한 가치도 ‘자유’였다. 80년 광주에서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민중들이 독재세력들로부터 되찾은 것도 자유였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폭도니 빨갱이니 하는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 극우세력의 명분도 자유다.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추상적인 진리는 없다. 진리는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 사족: abstract와 관련하여, 앞글에서 말한 ‘추상’(동사, 명사)과 이 글에서 말한 ‘추상적인’(형용사)는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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