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다.
작년까지 근무한 ㄷ초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며칠 뒤 강당 개관식을 하는데 강당도 구경하고 밴드부 애들 공연하는 것 좀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ㄷ초에 2년 동안 근무하면서 내가 밴드부를 만들어 지도했지만, 현재 지도교사가 따로 있는데 내가 그런 목적으로 참석하는 게 난처했지만 망설임 끝에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식전행사로 밴드부 아이들이 리허설 하는 것 보러 일찍 도착했건만 아이들은 연습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가 있었다. 휑한 강당 무대에 차려진 악기들을 보면서 밴드부를 맡으며 치열하게 벌인 일들이 떠올랐다. 현재 4~5학년으로 구성된 밴드부 아이들은 모두 내가 담임 했던 아이들이다. 창고에서 썩고 있던 싸구려 통기타 세 대를 교실에 두고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에게 띵가띵가 가르쳐서 밴드부에 넣었다. 없는 살림에 좋은 악기 구하려고 인터넷 중고악기시장 뒤져서 김천구미역까지 달려가 판매자를 만나 그 무거운 커즈와일 88건반 들고 온 것이나 중고악기 구입은 곤란하다는 행정실장과 실랑이를 벌이던 일, 그리고 지도강사비를 악기구입비로 돌려 장비를 확충하고자 애썼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련한 과거의 추억에 빠져들 무렵 수업 마침 종이 쳐서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잠시 뒤 이 넓은 강당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이들이 입장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첫 해에 가르쳤던 5학년 아이들이 나를 보고선 놀라며 반가워한다. 그리고 관내 교장들이 하나둘씩 입장하는데 몇몇 분들과 얼굴이 마주쳤다. 아는 후배 교장이 ‘어, 선배님!’ 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내가 있을 자리는 내빈석이 아니라 무대 옆 준비실이다. 오프닝 순서로 자랑스러운 ㄷ초 밴드부 아이들이 풍악을 울리는데, 기대한 대로 잘 한다. 드럼 치는 녀석이 신나게 북을 두드려 대는데, 심벌 박자에서 대고(베이스드럼)를 빼고 심벌만 ‘땡’하고 치는 것이 유감이다. 작년에 연습할 때 귀에 따까리 앉도록 일러줬건만...
연주가 끝났으니 내 소임도 끝났다. 강당을 벗어나 옛 동료들을 만나러 교무실로 향하려는데, 작년에 담임했던 4학년 아이들이 나를 보고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내 교직생애에 가장 기억에 남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어떤 녀석들은 엉엉 울면서 안긴다. 아이들이 우니 나도 마음이 짠했지만 근근이 눈물을 참아냈다. 다시 만난 아이들과 ‘재회family reunion?’ 기념 사진을 찍고 빠이빠이 한 다음 교무실로 갔다. 이 행사 준비하느라 교무실과 행정실 직원들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다음 날 한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주 소심하고 내성적인 이 아이는 놀랍게도 작년에 나랑 헤어지는 시점부터 가끔씩 저런 식의 과감한 문자를 보내곤 한다. 성격이 소심하고 공부에도 자신감이 없는 아이가 입말 태도는 소극적이어도 글말에서 저렇게 적극성을 띠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내가 특별히 잘 해 준 것도 없었는데 “나를 잊지 못하겠다”고 하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문자 주고받다가 전화를 걸어서 1년 간 담임 맡았을 때 해주지 못한 따뜻한 1대1 담화를 나누었다. 요지는 “지금은 현재의 담임선생님에게 집중하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를 기억한다면 그때 내게 연락하면 너희들과 새롭게 인연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와 친한 친구 ㅇㅇ이는 내 책 ‘학교를 말한다’까지 구입해서 읽고 있다고 한다. 좀 전에 사진 찍을 때 엉엉 울었던 아이 중 하나다. 이 아이도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인데 나를 무척 따랐다. 학교 도서관에서 [교사가 교사에게]를 빌려 읽길래, “너 이 책 이해가 되더냐?”라고 물었더니 엄마와 함께 재미있게 읽었다고 답하던 아이다. [교사가 교사에게]는 몰라도 [학교를 말한다]는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불온서적’인데 약간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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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교장이 되어 있다. 한 10년 전 쯤에 내가 아는 어떤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정년이 얼마 안 남았음에도 기를 쓰고 교감이 되기 위해 애쓰는 그 분에게 “왜 그리 승진에 집착하냐?”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도 젊을 때는 승진 뭐하러 하냐 했는데 막상 나이가 들어보니, 사람은 나이에 걸맞은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디다!
승진에 필요한 부가점을 따기 위해 늘그막에 연구부장 맡아 시범학교를 억지로 유치하는 과정에서 나한테 욕도 많이 먹었지만 사람 좋은 그 선배는 나와의 부딪힘을 피하셨다. 정년을 1년 앞두고 오매불망 꿈꾸던 교감 발령을 받았을 때 환하게 웃음 짓던 그 선배의 얼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교사들에게 승진은 엄중한 실존적 문제이다. 그 선배의 말은 이 땅의 교사이면 누구나 수긍할 만큼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나는 후배 교사들에게 그 선배의 말이 틀렸음을 입증해보이고 싶다.
교사인 사람에게 나이에 걸맞은 자리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라는 것을!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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