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표에 이어 우리 반 넘버2 성태 이야기다.
준표와 달리 성태는 다른 아이를 해코지하거나 나를 화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이 녀석은 교사를 답답해 미칠 지경으로 만들 뿐이다.
3월 첫 주에 치르는 진단평가에서 시험지를 하나도 안 풀고 백지를 내던 녀석이었다. 수업시간에 늘 4차원에 가 있다. ‘4차원’이란 말은 수업에 집중 안 하는 측면도 있지만 의식 수준이 또래 아이들과 다른 측면도 있다. 수업 시간 내내 먼산 보고 딴 짓 하는 녀석이 수업 마치고 쉬려고 하면 쪼르르 다가와 “선생님, 공룡 종류를 스무 가지 말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 순간 곧바로 “저는 말할 수 있어요!”라고 자문자답한다. 그러니까 발화의 방점이 뒤에 있는 것이다.
성태가 며칠 전부터 종례 마치고 집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기름밀대를 미는 모습을 보인다. 보통의 아이들에게 학교 일과 마침 시간은 작은 해방감에서 얼른 교실을 벗어나고픈 것이지만, 이 녀석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늘 일삼는 특유의 기행인가 싶었다. 즉, ‘기름밀대를 가지고 노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아이가 둘째 날에는 기름밀대를 밀면서 슬그머니 내게로 다가와 귓속말로 묻는다.
“선생님, 제가 왜 이러는지 아세요?”
늘 그러듯이 곧바로 묻고 답하길
“스마일 하나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한다.
내가 학급을 운영하는 상벌시스템으로, 이를테면 “우유를 전체 학생이 다 먹으면 스마일1점, 안 마시면 프라운frown1점”이란 식으로 교사와 학생집단 사이에 내기를 벌여 아이들이 이기면 점심시간에 같이 놀이를 하는 상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선행으로 반 전체 아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게다.
초등교실에서 교사는 왕이다. 문재인대통령과 달리 나는 내 마음대로 신민을 통치한다. 복지정책을 펼치기 위해 부자들 눈치 보며 부유세를 올릴까 말까 하는 고민도 필요 없다. 교사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는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엎치락 뒤치락 끝에 슬그머니 스마일이 프라운을 근소한 차이로 이기게 해도 ‘승부조작’ 따위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
다음 날 수업시간에 성태 이야기를 공론화하며 ‘선행’을 주제로 철학수업을 열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이 있지만, 어린이가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어른인 선생님도 이렇게 못합니다. 나의 착한 행동이 설령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정말 좋은 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태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냅시다!
성태에겐 쌍둥이 동생이 옆반에 있다. 내향적인 성태와 달리 동생은 씩씩하고 덩치가 커서 힘으로도 실력(공부)으로도 형을 압도한다. 성태가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는 것은 이런 성장배경과 밀접히 관계있을 것이다. 내가 볼 때 싸가지 없는 동생 녀석보다 우리 반 성태가 훨씬 낫다.
어제 맨 마지막으로 교실 문을 나서는 아이를 불렀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서 꼭 안아주며 “성태, 사랑해!”라고 말했다. 교직생활 30년 넘도록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해본다.
내가 점점 착해지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는 건 좋은 일이다.
12.7.
'교실살이-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교장 (0) | 2020.04.04 |
---|---|
관계 (0) | 2020.04.04 |
수습교사제의 불합리성을 우려한다 (0) | 2019.08.21 |
수업하는 교장: 교육자의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필연성 (0) | 2019.08.21 |
내가 있을 자리 (0) | 2019.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