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프레이리

코드화 - 탈코드화

리틀윙 2017. 2. 25. 08:57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 사람대사람 옮김, 살림터, 2015> 377쪽~388쪽 인용 

 

대중문화운동(The Popular Culture Movement)이 설립한 문화서클에서 프레이리와 동료들은 민족주의, 개발, 문맹,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은 이러한 주제들을 그림과 슬라이드를 통해 소개했으며, 비문해자들과 함께 이러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 결과는 너무나 놀라워서 프레이리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성인을 위한 읽기 학습은 현실을 분석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며, 그들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환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그 엄청난 에너지가 읽기 학습을 촉진시킬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프레이리와 동료들은 브라질 비문해자들이 힘겨운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 그들은 자신이 직면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말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던져진 삶의 조건이 신의 뜻이나 운명 탓이려니 생각했다. 그러한 수동적 태도를 바꾸기 위해 프레이리는 자연과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는 인류학적인 문화 개념을 가져왔다. 프레이리는 이 차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비문해자들이 문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문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며, 그들 삶의 상황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했다. 프레이리에게 자연과 문화의 차이는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해 말과 글로 이루어진 언어의 중요성을 포함한다.

 

프레이리는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예술가인 프란치스코 브레난다에게 자연과 문화, 사람과 동물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에 관한 토론을 자극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그림을 부탁했다. 브렌난드는 10개의 그림을 만들었다. 아래의 그림들은 프레이리가 소유한 8개의 슬라이드이다. 원본은 브렌난드에게 있다. 전체 슬라이드는 그 뒤 비센테 드 아브레우(Vicente de Abreu)의 도움으로 2장이 추가되면서 완성되었다. 뒤에 그것은 파울루 프레이리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에 담겨 출간되었다.

 

일련의 10개 그림이 면밀히 분석되고 구조화되었다. 첫 번째 그림(그림 1)은 자연과 문화의 차이가 잘 드러나게끔 세심하게 고안되었다. 이어지는 그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차이를 세밀하게 나타낸 것들이다. 즉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그림 2-5),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연이 문화로 바뀌는 장면(그림 3, 그림 6, 그림 7), 문화로 소통하기(그림 2, 그림 8), 문화로서의 행동패턴과 전통(그림 9)을 드러내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그림 10)은 자신의 행동을 분석하는 인간존재의 가장 특징적인 능력을 다루고 있다.

 

 

<그림 1>은 브라질 북동부에서 온 비문해자가 자신의 지식으로 자연과 문화를 구별할 수 있다는 친숙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코디네이터는 그림 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으로 토론을 시작한다. 이런 식의 사물에 대한 이름 짓기(naming)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림 자료 제시에 익숙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슬라이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디네이터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차이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 낸다. “누가 우물을 만들었나?” “왜 그것을 만들었나?” “어떤 재료를 사용했나?” 질문은 계속 되었다: “누가 나무를 만들었나?” “나무와 우물은 무엇이 다른가?” “누가 돼지, , 사람을 만들었나?” “누가 집과 괭이, 책을 만들었나?” 토론은 점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즉 사람들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고 문명을 창조했다고. 비문해자들은 이들 차이를 구분한다. 그리고 토론은 그들에게 그것을 명명하고 명료하게 구별하는 낱말들을 제시해 준다. 토론의 결론에서 참가자들은 문화적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다.

 

 

<그림 2>를 통한 두 번째 토론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말 또는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폭넓게 소통할 수 있다. 자연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의사소통을 매개한다. 자연계는 실재하며(real), 우리는 조사와 대화를 통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자연 현실(natural reality)을 대조해 봄으로써 검토할 수 있다. 인간 대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주체(subjects)끼리의 관계이지, 어떤 사람을 위한 객체(objects)로서 존재하는 관계는 아니다. 이러한 의사소통은 서로 평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인식의 바탕 아래 대등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다면, 그는 의사소통 대신에 공보(公報)를 발표해댈 것이고, 따라서 대화는 깨지게 된다.

 

 

 

 

그 다음의 세 담론(그림 3, 그림 4, 그림 5)은 문화의 개념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면서, 어떻게 문화가 다음세대에 전달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룹은 <그림 3>에서 문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들이 특별히 지목한 것들은 활과 화살, 그리고 깃털이었다. 깃털이 자연에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깃털은 새의 몸에 붙어 있을 때는 자연에 속한 것이지만, 인간이 그것으로 옷을 만들면 문화로 변한다고 대답한다. 인디언은 글 대신 직접적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친다. 그룹은 문명 세계에 속해 있더라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은 <그림 4> 속의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비문해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그림에서 사냥꾼은 매우 정교한 구조로 만들어진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의 제작 방법은 분명 기록되어 있을 테고 오직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문화권에서는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총을 구입할 만큼의 돈을 벌 수 있고, 그래서 문해자에 의해 그 총의 사용이 통제된다. 참가자들은 활과 소총을 비교하면서 기술적 진보에 대해 토론한다. 그리고 세계변혁을 위한 사냥꾼의 성장가능성에 대해 분석한다. 이러한 변혁은 그것이 인간 해방과 인간화에 기여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그룹은 기술공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그림 5>는 사냥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수 없는 고양이를 보여줌으로써 문화 제작자로서의 인간 능력을 강조한다. 브라질리아에서 온 어떤 비문해자가 이렇게 지적했다. “이들 셋 중에서 두 명의 인간만이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문화를 만든 다음 사냥을 시작한다. 세 번째 존재인 고양이는 문화를 만들지 못한다. 고양이는 그저 계속해서 사냥만 할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냥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추적자(pursuer)일 뿐이다." 세 사냥꾼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들은 인간과 동물에 관해서 논할 때나 혹은 본능, 지성, 자유, 교육에 관해서 토론할 때 늘 참가자들의 주목을 끄는 주제였다.

 

 

 

 

그 밖에 공간(시골)과 시간(문자이전 시기의 인디언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토론을 나눈 뒤에, <그림 6>을 통해 문화서클 참가자들은 그들 자신이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진흙으로 항아리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 그들 형제와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고, 그 항아리가 위대한 조각가의 작품만큼이나 뛰어난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참가자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구두를 만들어.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책을 만드는 교수만큼이나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림 7>은 진흙 항아리의 용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진흙이 문화로 변형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들에 핀 꽃도 사람이 그것을 아름답게 배치할 경우 문화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문화를 만들어. 나는 그걸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알아.” 헤시피의 문화서클에 참여하는 한 여성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그림을 통해, 처음으로 도해적 상징(graphic signal)이 도입된다. 꽃병 표면에 그려진 꽃 그림은 꽃병에 담긴 실제 꽃을 표상한다. 문화로 변형된 자연이 다시 한 번 서술 상징(written symbol)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림 8>은 도해적 표상화의 두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비문해자들이 알고 있고 또 함께 만든 말이 글로 기록되어 전해질 수 있으며 이것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쓴 시 못지않게 훌륭한 문학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는 민중가요의 노랫말이고, 브라질 북동부의 어떤 사연이 노래를 통해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해지면서 비문해자들 사이에서 정교히 다듬어진 전통의 일부이다. 이 지역의 가수들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으며,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비문해자들에게 강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말과 노래를 통해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림 9>에는 두 명의 카우보이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양모를 입은 사람으로 브라질 남부 출신이고, 다른 사람은 북동부 출신으로 가죽옷을 입고 있다. 이 장면은 의상과 행동의 방식이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토론은 카우보이의 의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부의 카우보이는 모직으로 옷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양털은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동부의 카우보이는 가죽을 이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지역에는 소가 많고, 소의 가죽은 관목덤불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정도로 튼튼하기 때문이다. 카우보이들의 의상이 왜 서로 다른지에 대해 토론하면서, 참가자들은 행동 패턴이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때때로 이 그림은 변화에 대한 인간의 저항에 관한 토론, 즉 의복과 같은 전통은 필요에 의해 발전되지만, 전통은 머물러 있는 반면 인간의 필요는 전승된다는 것을 이끌어낸다.

 

 

<그림 10>을 통해 그룹은 비판적 의식을 고양시킨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활동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문화서클의 의의를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문화서클이 그들 자신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한다. 코디네이터는 문화서클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문화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ulture)”라는 개념에 대해 토의하도록 안내한다. 한 참가자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문화의 민주화는 지금 현재의 우리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가 민중으로서 만들어 내는 문화에 관한 것이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서클의 의의는 모든 사람에 의해 검토된다. 모든 참가자들은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고, 대화는 무엇이며, 그리고 대화가 의식과 연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검토한다. 그룹이 이 10번째 그림에 이르렀을 때 참가자들은 그들 스스로 확실한 자신감을 회복했고, 그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읽기를 배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코디네이터들은 텍스트나 글을 사용하지 않고 10개의 상황에 대해 순전히 말로 토론을 진행한다. 참가자들이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고도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 숙고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아이디어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제시되었다. 참가자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실제 지식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읽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열망을 회복할 수 있었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과정을 conscientizacao라고 불렀고, 이것은 흔히 의식화(conscientization)”로 번역된다. 프레이리에게 의식화는 사람들이 그들의 현실을 분석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과정이다. 억지로 강요된 그들 삶의 난관에 대해 인지하고, 그들의 상황을 변형시킬 수 있는 행동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프레이리에게 교육은 해방시키기 아니면 길들이기이다. 사람들이 비판적이 되고 난관을 넘어서게 하거나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문해(읽고 쓰는 것)의 목적이 길들이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의식화 과정의 일부이어야 한다고 프레이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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