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애국심에 관하여

리틀윙 2011. 12. 25. 23:40

   고교시절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려고 했다. 아찔한 이야기지만나는 육사 턱밑까지 갔다가 왔다. 1차 지필시험을 패스한 후 태릉 육사 연병장에서 치른 2차 체력/신체검사까지 통과하고 맨 마지막 관문에서 낙방했다. 그래서 교대를 간 것인데, 나는 운명이란 걸 믿지 않지만, 육사에 가지 않은 것은 육사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매우 바람직한 결과라 생각한다.

철부지 청소년이었던 내게 무슨 마음이 들어 육사를 지망했을까? 그 나이의 소년이면 누구나 가질 법한 제복에 대한 로망 같은 것도 있지만, 당시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애국심이란 정념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 어릴 때 이순신장군 이야기 같은 영웅전을 읽으면서 남다른 감동에 취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하는 자기 최면을 걸어왔던 것 같다. 물론 소아병적 홍역이었겠지만 그게 지금은 사회의 진보를 위한 약간의 헌신적 생활 태도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런 나의 성향이 그리 부끄럽지만은 않다.

 

무릇, 사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작용하는 법이다. 과유불급이라고, 우리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어떤 가치체계가 한 발자국만 더 내딛게 되면 악을 구성하는 역설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공부도 운동도 잘 하여 급우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가 반장이 되었을 때 그 빛나는 리더십이 때론 독재로 이어지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애국심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애국심이라는 것이 비판정신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고 맹목으로 치달으면 국수주의가 된다. 히틀러의 독재와 홀로코스터가 독일국민에게 정당화되던 이유가 이것이 아니던가?

 

KBS가 제작한 유태인에 관한 2부작 다큐물 2<유태인은 어떻게 미국을 움직이는가?>를 보면서 흥미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인구의 2%밖에 안되는 유태인이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정치나 경제는 물론 영화계도 유태인이 움직인다. 유명한 감독으로 스티븐 스필버그나 스탠리 큐브릭, 우디 알렌이 있지만, 영화제작자들도 유태인이 많다. 그 중 한 인물로 댄 고던이란 사람이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고던은 제작자이자 영화작가인데 케빈 베이컨 주연의 유명한 영화 <1급살인>이 그가 쓴 작품이다. 그런데 유태인인 고던은 장롱 속에 늘 이스라엘 군복을 모셔 놓고선 언제라도 이스라엘이 전시상황이 되면 군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하는 노익장과 애국심을 과시한다. 현재 70이 다 돼가는 늙은이가 말이다. 사진은 2006년 레바논전에 참전했을 때의 모습인데, 자막 내용이 흥미롭다. 교전을 벌이는 도중에 헐리우드 영화업자에게서 휴대폰이 걸려와 대화를 나누던 중 상대방이 거기 왜 그리 시끄럽냐니까 고든이 전투 중이다고 답하자 상대방이 전쟁 영화를 틀어놓은 줄 알고 볼륨 좀 줄일 수 없냐고 했다고 한다.

 

 

 

고든의 경우를 보며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랍 학생과 이스라엘 학생의 대조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전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짐을 싸고 후자는 자발적으로 군에 들어가기 위해 짐을 싼다는 것이 과장된 일화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억만장자인 노인네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건 전투에 참여할 정도니 이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겠다는 마음 자체는 숭고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내 민족 사랑이 타민족의 불행으로 이어질 때 과연 그것이 미덕인가 하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 국민의 애국심은 시온주의로 대변된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바, 20세기 중반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과 박해 그리고 인권유린과 궤를 같이 한다.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국민이라면 이 비인도적인 만행을 멈추라고 절규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애국심이 아닐까?

아래 사진은 비무장의 팔레스타인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음에도 이스라엘 장갑차가 지나고 난 자리에 두 사람의 주검만이 남겨진 장면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저에 대해 뭐라고 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끝으로, 팔레스타인의 한 소녀가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자. 이 아이의 애국심과 장갑차에 타고 있던 이스라엘 군인의 애국심을 비교해보자.

 

살람 알레이꿈! 코리아 친구들, 안녕하세요?

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Annes Mans라고 합니다.

이 편지가 코리아의 벗들에게 알려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올해 가자 지구는 가장 슬프고 끔찍했습니다.

지난해 이스라엘의 침공과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1년 전, 오늘을 기억하기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이 폭탄을 맞아 흔적조차 없어지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으세요?

제가 살던 집은 벽이 무너지고 창문이 파괴되는 정도였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은 이웃집을 전전하거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폭격된 그 집에서 낡은 이불 한 장으로 이 추운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이스라엘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사람 몸에 3도의 화상을 입히는 무시무시한 무기인 백린을 가자지구의 민간인 밀집지역을 향해 날렸습니다. 거리마다 내부 장기까지 모조리 까맣게 탄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시체가 처참하게 흩어져 있는 것을 지켜보며 솟구치는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심지어 UN이 운영 중인 학교 주변에 백린탄을 쏘아서 학교에서 나오던 어린이 2명이 죽고 15명 정도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인한 치명적 상처는 가자지구의 많은 아이들이 말을 잃게 했고,

소변을 가리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1월 초 이스라엘의 탱크는 집에서 탈출하던 아버지와 아들 2명을 죽이고 어머니와 딸이 있던 집을 탱크로 밀고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 어머니와 딸은 살아남았지만, 그 때 쇼크로 인해 말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폭격이 끝나고 가족들이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이 써 놓은 편지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편지에는 아랍어로 미안했습니다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폭탄을 던지며미안했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이스라엘은 오늘도 가자지구 서쪽 지중해에 무장병력을 배치해 두고,

하늘에는 정찰기를 띄워 우리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 헬기 소리는 정말 소름이 끼쳐요. 가자지구는 지난 2년간 개미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고,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장 먹을 음식도, 전기도, 집을 수리할 건축자제도, 겨울을 날 연료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 달에는 의료품을 구하러 국경의 터널에 들어갔다가

이스라엘이 던진 폭탄으로 11명의 가자지구 사람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침공 1주년을 앞두고 있는 오늘도 3명의 가자지구 사람이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날마다 마음 속으로 눈물로 외쳐 봅니다. , 꿈에서라도 이 거대한 감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거대한 분리장벽이 무너지고 서안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죽기 전에 그럴 수 있을까? 우리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아무도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무엇보다 간절한 외침이 있다면

가자를,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단 한 가지, 무엇보다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엄마, 아빠, 언니, 오빠가족들과 함께 둘러 앉아 평온한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기를

이스라엘의 점령이 어서 끝나 가자지구의 사람들에게도 평화와 정의의 날이 함께 하기를

우리도 코리아의 친구들처럼 자유를 느낄 수 있기를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가자를 잊지 말아주세요.

 

20091226

가자지구에서 Annes 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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