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은 월요일 아침마다 교사와 전체 학생들이 주말에 있었던 일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주에 내가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를 봤다고 하니 한 여자 아이가 “우리 엄마가 그 영화 보고 많이 울었대요!”라고 했다. 아이의 이 발언으로 반 전체 아이들이 이 영화의 주제인 성차별 문제에 관한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과 ○○이 어머님 슬픔의 인과관계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아가 여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거나 설움을 느껴본 사람 있나요?”
손드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 여자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고 학교에서도 성차별을 경험할 일이 잘 없다. 적어도 학교 시스템 상으로 양성평등의 원칙은 엄격히 준수되고 있다. 교과서에서 성평등 단원을 특별히 다루고 있으며 출석번호 배정에서도 남녀 구분을 없애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 교육과정의 이야기일 뿐이다. 교육은 비단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릇된 젠더 정체성은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시나브로 형성되는 법이니, 초3 아이들도 앞으로 차츰 크고 작은 성차별을 겪으면서 왜곡된 성역할 질서에 익숙해져갈 것이다. 여기서 학교 교사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최근 어느 남중학교에서 교사가 수업시간에 “남자는 평생 △△(여성 성기를 비유하는 말)을 잘 찾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어느 학생의 폭로를 통해서인데, 나는 많은 남학생들이 교사의 발언에 흥미를 보이거나 맞장구를 치며 호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사가 주도한 남자 대 남자끼리의 마초적인 의기투합을 통해 남학생들이 왜곡된 젠더 정체성을 학습해갈 것은 뻔한 일이다. 이 교사는 학생들 외에 동료 여교사들에게도 성희롱 발언을 일삼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를 ‘성비위’가 아닌 ‘교사품위위반’으로 규정하여 불문경고 처분에 그쳤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광주의 배이상헌 교사는 학생들에게 성평등 수업 자료로 프랑스 페미니즘 영화를 보여주다가 이를 불편하게 여긴 여학생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직위해제를 당했다. 성희롱을 한 교사는 징계처분을 벗어나 불문경고에 처해진 반면, 성평등 수업을 한 교사는 최고 수위의 징계 대상자에게 가해지는 직위해제를 당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교육청의 부당한 직위해제 조치보다 더 황당한 것은 여성단체의 태도다. 몇몇 여성단체들이 연대하여 “성평등교육을 말하며 스쿨미투 피해학생의 목소리를 지우지마라”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꽉 막힌 교육청 관료들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진보를 표방하는 단체에서 이런 성명서를 낼 수 있는 것일까? 배이교사가 여학생의 신체에 접촉을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억압받는 소수자인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만든 급진적인 영화를 보여준 것뿐인데 어떻게 ‘스쿨미투’라는 논리가 성립한단 말인가?
교사가 학생의 몸을 만진 것도 언어로 희롱한 것도 아니지만 / 교사가 교육자료로 제시한 영상자료로 인해 성적 수치심을 느꼈으니 가해-피해 관계가 성립하고 / 가해자는 남교사 피해자는 여학생이니 ‘스쿨미투’라는 것이 이들 논리의 전부다.
사고가 미분화된 어린아이에게서나 볼 수 있는 비지성적인 형식논리의 극치를 목도하게 된다. 지성적인 안목으로 들여다보면 배이교사가 수업시간에 투입한 영상물은 정말 훌륭한 페미니즘 교육자료임을 알 수 있다(적절히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차치하고).
‘성적 수치심’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학생들이 문제시 삼는 영화의 어떤 장면들보다 다리 쩍 벌리고 민망한 춤을 추는 걸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훨씬 더 하다고 봐야 한다. 어린 여성을 조야한 관음증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영상물에는 흥미를 느끼고 그대로 모방까지 하는 여학생들이, 이런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교사가 성평등 교육자료로 제시한 영화에 대해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낀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사와 학생 사이에 중대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할 때, “피해자중심주의”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면, 교육은 불가능하다. 성평등 교육이 불가능하면 성등평 사회도 불가능하다.
여성단체들이 이 사태를 ‘스쿨미투’로 몰아가면서 배이교사를 벼랑끝으로 내몰아 여성해방을 위해 무엇을 얻는지는 모르겠지만,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반 아이의 어머니께서 연신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82년생 김지영의 삶에서 자신을 보셨기 때문이다. 이 분은 자신의 귀한 딸은 자신처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실 것이다. 63년생 배이상헌 교사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남성이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성평등 교육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실천해왔다.
그런데 지금 몇몇 여성단체들은 그런 배이상헌 교사가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스쿨미투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가부장 사회에서 특권을 누려온 50대 남교사가 무슨 성평등교육을 하냐고 일갈한다. 페미니즘 공부 좀 했기로서니 남자인 주제에 감히 여자 학생을 가르치려 드느냐고 비웃는다.
50대 남교사는 아무리 각성을 해도 성평등교육을 할 수 없다면 성전환수술이라도 해야 하나?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을 못하겠다.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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