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인의 음악이야기

음악으로 생각하기, 생각으로 음악듣기

리틀윙 2011. 9. 26. 23:26

 

 

적어도 이삼십대까지 내 삶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10대 때엔 팝음악을 그리고 20대에 록 음악을 정말 좋아했는데, 내가 몰랐던 좋은 곡을 새로 하나 알게 되면 열광해 마지않았다. 그 기쁨은 금채굴자가 노다지를 발견했을 때의 그것 못지않은 것이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팝음악에 대한 열정은 재즈와 클래식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서서히 식어 갔다. 그리고 30대 이후 사물을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예전엔 그저 맹목적으로 몰입하던 팝음악을 대상화시켜 사회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다시 찾기(revisiting) 시작했다.

현재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사회의 진보이다. 아도르노(T. Adorno) 따위의 비판철학의 관점에서 팝음악은 사회의 진보를 저해하는 나쁜 문화이다. 상당 부분 공감하지만 꼭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이 무난한 견해일 것이다. 우리가 아도르노의 관점에 동의하든 안 하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클래식이나 재즈1)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팝음악은 호불호를 떠나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비판적인 관점으로 그것을 짚어보고 대안적인 무엇을 제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 영역에서 영화에 대해서는 그런 작업이 많이 이루어져오고 있지만, 팝음악에 대해 사회학적˙철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비평서적이 드문 것이 늘 유감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작업을 한번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진보적인 관점의 팝음악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진보? 진보의 내포와 외연이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그늘진 곳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내 전문분야인 교육의 예를 들면, 현재의 학교는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제 갈 길 잘 갈 소수의 똑똑한 아이들에겐 지극정성을 쏟는 반면 정작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은 방치하고 소외시켜 간다.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필요 없나니, '온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한 교육적 처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건만, 우리네 학교는 인류 최고의 스승이라 할 예수님이 시키는 것과 정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진보. 이러한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 진보다.

나는 사회적 약자의 외연 속에 일 순위를 차지해야 할 대상이 여성이라 생각한다. 이 세계의 절반이 여성이다. 장애인인 사회적 약자 가운데 여성인 사람, 빈민이면서 여성인 사람,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여성인 사람은 여성이란 이유로 최소한 이중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한다. 심지어 장자연씨의 경우를 보듯이 연예인 가운데도 여성의 경우는 남성 연예인이 겪지 않는 인권유린을 강요받게 된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사회의 진보를 외쳐대는 소위 운동판에서도 양성평등이 잘 지켜지지 않으며 여성활동가에 대한 언어적˙신체적 성폭력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점이다.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이고 또 가장 보편적인 사회적 약자이다. 사회의 진보에 대한 고민은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성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주1)

음악예술에 관한 한 극좌적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아도르노에겐 재즈도 저급한 문화산업으로서의 팝음악의 변종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스윙재즈(swing jazz)까지는 몰라도 그 후의 비밥(be-bop)부터 프리재즈(free jazz)에 이르면서 재즈의 수준은 어떤 면에서 클래식을 능가한다. 실제로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은 재즈 뮤지션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