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1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리틀윙 2010. 1. 16. 11:16

1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요약, Summary)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이 유지는 부단한 갱신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만큼, 삶은 자기갱신의 과정이다. 영양과 생식이 생물학적인 삶에 필요한 만큼, 교육은 사회적 삶에 필요하다. 이 교육은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통한 전달로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 소유가 될 때 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 모든 종류의 인간 단체의 궁극적인 의의가 경험의 질의 개선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쉽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다루는 과정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회조직이 교육적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이 교육적 효과가 단체의 목적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과 교섭할 때이다. 사회가 그 구조나 자원이 복잡해짐에 따라 형식적 또는 의도적인 교육(가르침과 배움)의 필요가 증대한다. 형식화된 교육과 훈련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보다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서 얻는 경험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사이에 달갑지 않은 간극이 생길 위험이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지식과 전문적인 기술의 급격한 성장을 볼 때, 그 위험이 오늘날처럼 컸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풀이)

제목에서 '필연성'이란 말은 조금 잘못 되었다.

Education As A Necessity of Life -> 이것은 (생물이 아닌) 인간 삶이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 이런 뜻이다.

이홍우의 번역에서 '필연성'이란 의역이 너무 지나치고, 김성숙의 번역은 "생명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교육"인데, 이건 완전히 잘못 되었다. life는 생명이 아니라 '삶'으로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듀이가 말하는 교육이란, 일반 생명체(동식물)가 아닌 인간 삶에서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life'는 우리말로 ‘삶’과 ‘생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제목에서는 (방금 언급했듯이) '생명'이 아니라 '삶'이 맞다. 그러나, 본문에서 life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뜻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래서 요약문에서 ‘삶’이란 단어는 ‘생명’ 또는 ‘생명체’ 라는 말로 바꿔도 뜻이 통한다. 예를 들면, 첫째 문장을 “존재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본질이다”로 읽어도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읽어야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본문 맨 첫째 문단에서 듀이는 생명체(living thing)와 무생물(ex 돌맹이)의 차이를 “자기갱신(self renewal)의 여부”로 구별하고 있다. 즉, 삶(생명체)의 특징은 “부단한 자기갱신”이란 말로 요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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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교육]인데, 왜 책의 첫머리부터 ‘생명체’니 자기갱신이니 하는 말이 나올까? 이 맥락을 분석하는 것은 죤 듀이 철학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초기 듀이 철학의 토대가 된 두 축은 1)생물학주의 2)헤겔 변증법이다.

‘생물학주의’란 생물학 이론에 근거하여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19세기 다윈주의(진화론)의 소산이다. 다윈 이전의 서양철학사는 모든 것을 ‘신’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론 일변도였는데, 1859년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이라는 한 권의 책이 이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이다. 죤 듀이는 서양의 정신계에서 지적 동요가 심하게 일고 있었던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자신이 철학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도 대학 3학년에 토마스 헉슬리의 생리학 강좌를 수강하면서였다고 한다.

철학에 눈을 뜨면서 죤 듀이가 맨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개념은 “상호 작용 하는 유기체(interacting organism)”인데, ‘유기체’라는 것이 생물학과 관계있고,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 헤겔 변증법과 연결되는 것으로 간단히 이해된다. 죤 듀이의 교육철학 전반에서 변증법적 의미가 풍부히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듀이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절대정신의 개념 따위)을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일러둔다. 물론, 그렇다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한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듀이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듀이의 교육사상을 비판적으로 음미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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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맥락을 짚고 나서 <요약문>의 다음 문장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된다.

즉, 무생물인 돌맹이는 외부 환경(본문에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대해 자기갱신을 통해 극복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숴지고 말지만, 생명체는 자기갱신을 통해 적응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 가운데 인간과 보통의 동식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보통의 생명체는 영양과 생식을 통해서만 자기갱신을 꾀하며 그저 “생물학적 삶”에 그치지만, 인간은 그것외에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바, 이 사회적 삶의 갱신이 바로 교육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 1장의 핵심 내용이다. - 1장의 핵심 키워드는 ‘(자기)갱신’이다.(김성숙의 번역본에서는 ‘renewal’ 이란 단어를 ‘새롭게 하기’로 번역하고 있음)


계속해서 <요약>의 다음 몇 문장들은 인간집단에서 ‘경험’에 터한 소통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듀이 특유의 문체나 어법(code)에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이 말 또한 그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담론의 대부분은 사실 알고 나면 간단한 내용들이다.) ‘경험’은 세대간에 축적되어 전수된다. 예를 들면, 농사짓는 노하우를 후손들은 선조로부터 배운 뒤에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 세대간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노하우가 점점 정교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듀이가 말하는 ‘자기갱신’이다. 그리고 내가 표현한 ‘전수’라는 말이 듀이의 어법으로는 소통(communication, 번역문에서는 ‘의사소통’이라 옮겼지만, 문맥상 보다 넓은 의미의 ‘소통’이 더 적합하다)과 관계있다.

소통이 교육이라면, 그것은 성인이 아이에게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수평적인 관계, 즉 집단 구성원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니 이것이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하는 ‘소통’의 개념이다. 그런데 듀이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도 교육이라 생각하는 것이 주목을 끈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modify) 것이다. <요약>에서 “의사소통은 그것에 참여하는 쌍방의 성향에 수정을 가한다(modify)”는 말이 이런 뜻이다. 아무튼, 인간 삶은 경험과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해가며, 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이루어지는 모든 소통은 곧 교육이다.


사회생활이 바로 의사소통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은(따라서 모든 사회생활)은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이홍우 역, p.16 ; 김성숙 역, p.15, 셋째문단, 괄호는 듀이.


이 훌륭한 말은 듀이의 교육철학의 한 중심개념인 “삶이 곧 교육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지금은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처분된 ‘생활중심교육과정’이 죤 듀이의 이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미친 교육’에서 삶은 없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공부를 쉽고 재밌게 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어렵게 공부하며 그것을 잘 버텨내는 “오직” 끈기있는 아이가 “지적으로 유능한 아이”로 인정받는다.


그 다음 두 문장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어려운 듯하지만, 간단히 “교육은 백년지대계” 또는 “어린이는 미래의 주역”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현세대의 경험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잘 전수하고 그렇게 잘 교육받아 똑똑해진 후손들이 선조의 노하우를 확대재생산 시켜야 그 집단(부족사회나 국가)이 부흥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에서 ‘교섭’은 영어로 ‘association’인데, 이것은 앞의 ‘소통’이란 말과 거의 동어의로 쓰이고 있다. 이홍우선생의 번역이 짜증나는 것이 이런 부분이다. ‘교섭’이라 하면 무슨 ‘단체교섭’이란 의미를 연상시키는데, 현대인 가운데 교섭이라는 낱말을 '관계맺음' 또는 '소통'이란 뜻으로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이제 세 문장이 남았다. 이 부분은 쉽게 읽힐 것이다.

대학교 때 교육학 교양과정에서 배웠던, ‘비형식적 교육’과 ‘형식적 교육’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봉건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교육은 생활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논에 물 대는 것이나 새끼 꼬기 같은 것을 아이들이 무슨 연수원에서 배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비형식적 교육이다. 반면, ‘형식적 교육’의 대표적인 예는 ‘학교교육’이다.

그런데, 인간 삶이 복잡해지고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형식적 교육이 비형식적 교육을 대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교육적으로(교육철학적으로) 매우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듀이가 적고 있다.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이 글의 맥락과 관련해서는...... 교육이 삶에서 분리되는 위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듀이가 말하는 ‘간극’이라는 것이 이 분리를 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