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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냐 구조냐?

리틀윙 2021. 6. 17. 15:39

사람이냐 구조냐?

실로 인간 세상에서 빚어지는 대부분의 문제, 거의 모든 사회적 이슈는 이 물음으로 환원된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이에 관한 철학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못 벗어나는 이유나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학업성적이 낮은 이유에 대해, 개인의 의지나 노력의 문제로 볼 수도 있고 불평등이 고착된 사회구조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사람이 문제라는 시각이 ‘보수’이고 사회구조가 문제라는 시각이 ‘진보’에 해당한다고 보면 대체로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어느 관점이 옳은가 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구조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중요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는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부분을 주관성(subjectivity, 주체성), 구조에 해당하는 부분을 객관성(objectivity)으로 규정했다. 주관성은 개인의 자질로서 역량, 의지, 태도, 열정이 포함되고, 객관성은 개인을 둘러싼 환경, 제도, 여건 등을 뜻한다. 주관성을 중시하는 관점이 주관주의(subjectivism), 객관성을 중시하는 관점이 객관주의(objectivism)인데, 프레이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실천 주체들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흥미 있는 교육영화 [프리덤 라이터스Freedom Writers]에서 주인공 여교사는 불굴의 의지와 실천력으로 불량 학생들을 감화시켜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문학도의 길로 인도한다. 빈민가에 위치한 이 학교의 아이들은 학교 안팎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거친 삶을 살아간다. 이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1주일을 못 버티고 떠나지만 그루웰 선생은 문자 그대로 ‘사랑의 교육’으로 망가진 아이들의 영혼에 빛을 씌워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루웰의 가정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루웰의 선한 남편은 어느 날 밤 짐을 싼 뒤 “가정과 학교, 자신과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자 그루웰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편을 붙잡지는 않는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특히 교사들에게 그 감동은 각별히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엔 그 감동을 뒤로 하고 허탈감이 밀려온다. ‘나도 교사인데 나는 저 사람처럼 될 수는 없다’는 자괴감이 엄습해온다. 도대체 지구상에 저런 슈퍼맨/슈퍼우먼 같은 교사가 몇이나 될까? 참교육을 하려면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온 힘을 다해 학교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

 

열악한 교육환경(객관성)에 던져진 참교사가 초인적인 열정과 헌신(주관성)을 발휘해 마침내 참교육을 성사시킨다는 설정, 이것이 교육영화들의 일관된 플롯이다. 감동적인 스토리가 현실의 교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고취하고 교육적 영감을 자극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 하에서도 선생 하기 나름이다”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고가 프레이리가 말하는 ‘주관주의적 오류’에 해당한다.

 

주관주의적 오류의 반대편에 객관주의적 오류가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의 중요성을 절대시하고서 사회구조적 모순의 해결에 실천 주체들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사고가 객관주의적 오류에 해당한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어 친구 사귀기 위해서라도 학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을 볼 때, 릴케에 심취하고 브람스에 빠져들어야 할 청소년들이 밤늦도록 야간자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된다. 질곡의 입시제도를 혁파하지 않으면 참교육은 불가능하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거대 악(惡)을 해결하기 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이는 올바른 생각도 아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구조가 더 중요한 것은 틀림없다. 지난 주 충북에서 이번 주 광주에서 혁신학교에 강의하면서도 그런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1주일 내내 오전에는 교육과정 설계하고 오후에는 교사다모임과 연수에 참여하면서도 선생님들의 표정에서 어떤 행복감과 혁신교사로서의 자긍심이 느껴져 왔다. 혁신학교의 교사들이 태생적으로 타 학교 교사들보다 혁신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을 리는 없다. 선한 구조가 선한 사람의 자질을 만든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선한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튼실한 혁신학교는 참교육을 열망하는 소수의 활동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자양분으로 열매 맺는다. 선한 구조도 결국 선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구조가 중요하다 해놓고선 또 사람이 중요하다 하니 도대체 뭐가 답이란 말이냐고 항의할 것 같다. 그런 불만은 이분법적인 오류일 뿐이다. 진리는 “이거냐 저거냐 either-or”의 형태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일 수도 있다. 선한 교육구조가 선한 교사와 학생을 길러내기에 사람을 바꾸는 일보다 구조를 바꾸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화두가 그런 뜻이다.

 

인간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 가운데 후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기계적 유물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는 그 대표 사상가인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인 까닭에 변화된 인간이 (기존 환경과는) 다른 환경 및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