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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학폭위원회인가?

리틀윙 2021. 6. 17. 15:44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사회가 학교폭력 문제로 몸살을 앓아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학폭 미투’가 확산됨에 따라 유명 스타들이 연이어 활동을 중지하거나 은퇴를 하여 국민들을 경악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죠. 이런 현실 속에서 학부모님들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학교에 보낼 때 가장 염려되는 문제가 ‘혹 우리 아이가 학교폭력에 노출될까’ 하는 것일 겁니다.

 

유념할 것은, 지금 학교에서 학교폭력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이 대두되고 있는 점입니다.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보호하고 가해학생을 선도한다는 취지로 2007년에 제정된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법) 이후 정작 학교폭력의 진원지라 할 중고등학교에서는 학폭 사례가 많이 줄어들고 있는데 초등학교에서는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초등학교 1~2학년에서 확연한 증가추세를 보이는 점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대관절 학교에서 뭘 가르치길래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폭력배가 돼가고 있다는 말일까요? 실상은 초등 저학년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들 세계에서 학폭 신고가 많은 것이 전부입니다. 30여 년 교사생활을 해오고 있는 제가 보기엔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변함없이 착하고 순수합니다. 그런데 학부모님들은 그때와 너무 다릅니다. 예전에는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이 학교폭력대책위원회(학폭위)에 회부되어 멀쩡한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둔갑되는 것입니다.

 

이 요상한 아이러니는 학폭법이 피해자중심주의에 바탕하여 운용되고 있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법치사회에서 누구든 자신의 불편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법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자기 아이의 말만 듣고서 분노한 학부모들이 과도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학폭위를 소집하는 사례가 너무 잦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학폭위를 통해 얼마만큼의 위로를 얻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장기의 또래집단 사이에서 너무도 자연스레 발생하는 이런저런 다툼을 법리(法理)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초래할 심각한 교육적 역기능에 대해 우리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둠살이에서 다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싸우면서 커가는 것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튼실한 성장을 위해 다툼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툼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주장을 펼치고 의사를 개진하면서 용기와 지혜를 익혀갑니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의 다툼은 반드시 얼마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해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양보와 타협의 이치를 배워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다툼에 학부모들이 개입하는 것은 이 소중한 체험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하디귀한 내 아이가 또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부모 된 사람의 마땅한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초등 저학년의 세계에서 부모가 개입해야만 해결되는 문제란 있지 않습니다. 웬만한 문제는 그냥 내버려 두면 아이들끼리 다 해결될 것이고 심한 경우도 담임선생님께 맡겨 놓으면 원만하게 풀립니다.

 

저학년 담임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학폭위에 회부되는 문제들이 정작 다툼의 당사자인 아이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부모가 개입함으로써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이들끼리의 문제가 어른들끼리의 싸움으로 비화되어 대리전의 성격을 띠는 것이 ‘학폭위’의 본질이라 하겠습니다.

 

소규모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반 전체 학생 수가 10명 남짓한 2학년 교실에서 아이가 또래들로부터 왕따를 당한다는 말에 분노한 학부모의 요구로 학폭위가 열렸습니다. 학폭위라는 이름의 ‘법정’에서 자녀의 친구들은 졸지에 가해자가 됩니다. 이 아이들도 누군가의 자식들인데 그 부모들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죠.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학폭위 이후 가해 학생의 부모들은 피해 학생의 부모와 길에서 마주칠 때 눈인사도 안 하고 지나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개입으로 피해 학생은 또래들로부터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6학년 졸업할 때까지 그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또래들이 그 부모가 무서워 아예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학년과 달리 고학년에서는 심한 학교폭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학교폭력인 거죠. 하지만 이 경우에도 웬만하면 학부모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이가 닥친 문제는 아이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심성이 온화하고 기질이 약한 탓에 이런저런 악동들의 표적이 되는 아이는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와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가 주입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체득하는 성질의 것인 까닭에 쟁취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삶의 본질은 홀로서기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우리 모두는 이 험한 세상에 나약한 존재로 내던져진 것(Geworfenheit)입니다. 삶 자체가 부단한 폭력과의 마주함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약한 아이의 기나긴 삶의 길목 곳곳에서 부모가 개입하여 학폭위를 열어줄 수 없습니다. 아이 스스로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술과 전략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기투적 삶(Entwurf)을 쟁취하게 해야 합니다. 학교는 그러한 결기의 바탕이 되는 몸과 마음의 근육을 길러가는 체험학습의 장입니다. 아이의 문제에 섣불리 부모가 나섬으로써 이 뜻깊은 체험의 기회를 무산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울면서 집에 들어오는 아이 앞에서 담임선생님께 전화 드리기 전에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학폭위가 될지” 차분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