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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벌떡을 위한 학교는 없다

리틀윙 2021. 6. 17. 15:42

교직사회는 일정한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영위되는 점에서 전형적인 관료조직이라 할 수 있다. 교무회의가 그 단적인 방증이다. 교무회의는 ‘직원협의회’로 통용되는데, 말이 ‘협의회’이지 협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업무담당자의 지시 또는 전달과 교감 교장의 ‘훈화 말씀’이 전부이다. 이 엄숙한 회의 석상에서 간혹 돌출적으로 일어나서 자기 의견을 표출하는 교사가 있다. 이런 교사는 ‘벌떡교사’라는 낙인을 감수하는 점에서 비상한 용기와 소신의 소유자라 하겠다.

 

라때는 벌떡교사의 열에 아홉은 전교조교사들이었고 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전교조와 전혀 무관한” 벌떡교사들을 더러 보게 된다. 편의상 전자를 ‘전교조 벌떡’ 후자를 ‘신종 벌떡’이라 칭하기로 하자.

 

전교조 벌떡과 신종 벌떡 사이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교육적 대의를 위해 일어서고 후자는 사적인 이해관계의 관철을 위해 일어선다. 전자의 당파성이 아이들을 향한다면 후자는 교사들을 향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사집단으로부터 전교조 벌떡은 반감을 사는 한편 신종 벌떡은 호응을 얻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두 벌떡이 경합을 벌일 일은 없다. 예전엔 신종 벌떡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은 후자가 벌떡 일어설 때 전자는 침묵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왕년의 전교조 벌떡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정의와 참교육의 이름으로 부조리한 권위에 맞서 싸웠다. 관리자는 물론 선배 교사들을 향해서도 “부끄러운 줄 알라”며 거침없이 대성일갈했다. 나의 사자후에 누구든 반발하면 기세에 밀리지 않고 논리로 압도하곤 했다.

 

그러나 왕년의 그 벌떡이 원로교사가 된 지금 신종 벌떡 앞에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 너무 서럽고 참담하다. 젊은 시절 선배와 권력자는 두렵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새파란 후배와는 맞서는 자체가 어려울 따름이다.

 

관료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 눈치 안 보고 벌떡 일어서서 자기 소신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용기 자체는 대견하다 할 것이다. 그 벌떡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벌벌 떨면서 일어나서 발언했다. 두려움은 사적인 것이고 용기는 공적인 것이다. 전교조 벌떡이 벌벌 떨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대의를 위해 누군가가 한마디 해야 한다는 일념의 발로, 즉 공적인 용기가 사적인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신념의 힘이 전부이다.

 

그런데 신종 벌떡에겐 이런 신념은 엿볼 수 없고 오직 사적인 이익에 대한 욕망이 전부일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에 소름이 끼쳐온다. 철학도 소신도 없이 어떻게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벌떡 일어서서 교장의 의지에 반하는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34년 나의 교직경험 상 이런 일은 너무 낯설기만 하다. 이런 교직사회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예전의 학교는 교장의 말이 곧 법이었지만, 요즘은 교사들의 요구를 함부로 무시 못한다. 그래서 학교의 중대사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벌떡 교사의 한마디가 큰 위력을 떨친다. 3월 첫 회의에서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한 어떤 지침을 하달하자 신종벌떡이 일어서서 한마디 함으로써 무산시켰다.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나도 벌떡 일어서서 교장 샘 편을 들려다가 참았다.

 

전교조 벌떡이 교장 편에 서서 교사와 맞서야 하니... 세상말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더니, 원로 벌떡을 위한 학교가 없는 듯하여 교직생애 처음으로 명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선천성오지랖조절장애가 있는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 잘 견디지 못한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