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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회의와 회사 회의

리틀윙 2021. 6. 17. 15:28

회사 광고를 맡은 5명의 부서원들이 테이블에 앉아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회의 주제는 "회사를 홍보하는 구호 선정하기"이다. 여자 팀장이 들어와 앉으면서 회의가 시작된다.

 

팀장: 다들 준비됐지? , 던져봐!

남자1: 세계의 중심 글로벌 삼진.

팀장: 약해.

남자2: 월드 베스트 글로벌 삼진.

팀장: 뻔해.

여자1: 세상을 즐겨라. 인조이 월드 글로벌 삼진.

팀장: (제안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유는?

여자1: 소비자의 관점에서 익사이트한 게 뭔지 생각해 봤습니다.

팀장: 나쁘지 않아. (잠시 생각하다 불현듯 흥분된 목소리로) 이거 좋은데! 엑썰런트!

 

요즘 인기 있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회의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모두 저런 식으로 열린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회사에서 회의가 저런 방식이 아닌 학교 교무회의처럼 열리면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교무회의 하듯이 회의를 여는 회사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 회사는 망할 것이다. 학교의 교무회의 방식이 뭐가 문제인지 삼진그룹 광고팀의 회의와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첫째, 회의의 구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휘자가 없는 교향악단을 생각할 수 없듯이, 회의를 진행하는 회의 주재자가 없는 회의도 생각할 수 없다. 교무회의에서는 보통 교무부장이 회의를 진행하는데, 삼진그룹의 팀장처럼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순서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멘트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둘째, 회의 안건이 없다. 안건이 없으니 의견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해 회의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론을 업무담당자가 전달하고 전체 교사들이 받아 적는 식으로 회의가 이루어진다. 회의 주재자 없이도 회의가 돌아가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결론이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는 그저 지시사항의 전달과 공유가 전부인 이것은 회의라 할 수도 없다.

 

셋째, 속전속결로 진행된다. 결론이 닫혀 있으니 회의 참가자들은 회의에 대한 어떠한 흥미도 관심도 없이 그저 회의가 빨리 끝나기만을 고대한다. 한마디로 너무 비생산적인 회의다.

 

생산적인 담론 없이 그저 회의를 위한 회의라면 안 여는 것이 바람직하다. 업무나 지시 전달은 학내 전산 네트워크(인트라넷)를 통해 얼마든지 공유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결국 교장선생님 말씀 밖에 없다. 학교장의 훈시가 교무회의의 유일한 존재이유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혹 삼진전자 광고팀과 달리 교무회의는 구성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회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교직원 수가 얼마 안 되는 소규모학교의 교무회의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큰 학교에서 중책을 맡은 소규모 인원이 여는 부장회의에서도 그 양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학교 교사들이 여는 회의 가운데 삼진그룹 광고팀의 회의와 비슷한 경우도 없잖아 있다. 동학년 교사들끼리 여는 회의(학년회의)가 그러하다. 이를테면 학년 단위의 학교 행사로 운동회나 현장체험학습 같은 행사를 준비할 때 교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교육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을까에 대해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교무회의와 학년회의의 차이의 핵심은 자발성의 유무에 있다. 교사들이 회의의 필요성을 느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회의에 흥미를 품고 열심히 의견을 개진한다. 하지만 안건도 의견 개진도 없이 지시와 전달로 일관하는 회의에서 교사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회의가 얼마나 빨리 끝날 것인가 하는 것 뿐이다.

 

교무회의도 학년회의처럼 열어야 한다. 기존의 낡은 교무회의에서 없는 두 가지, 즉 회의주재자와 안건을 배치해야 한다. 교사들의 집단적 공감대가 형성된 문제를 회의 안건으로 상정하고 선량한 리더가 민주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면 건강한 의사결정은 저절로 도출된다.

 

그러면, 교무회의는 누가 주재해야 하는가? 교무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의 집행에 대한 결재권을 지닌 학교장이 주재해야 한다. 의사 결정 주체와 결정된 내용을 승인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면 그 회의는 하나마나 한 회의가 된다. 많은 학교에서 부장회의가 이렇게 이루어진다. 관리자 없이 부장들끼리 회의를 한참 하다가 우리가 실컷 이렇게 치열하게 결론을 내린들 교장선생님이 허락 안 해주면 헛일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부장교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것이다.

 

본인이 없으면 교사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할 수 있기 때문에 빠져 주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교장선생님들이 많다. 말이 안 된다. 민주주의는 결론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 교사들이 치열한 갑론을박 끝에 결론을 내리는 일련의 과정들에 학교경영자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직무유기일 뿐이다. 학교장이 부재한 교사회의는 대통령 없이 여는 국무회의만큼이나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학교장이 없으면 교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다는 말 자체가 본인이 권위주의자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학교장이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민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회의를 성실하게 이끌어가면 교사들도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교무회의가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질 때 학교는 진정 건강한 희망의 교육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다.

 

2.14.